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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18. 2022

동태눈이 초롱초롱해지는 마법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7

준호는 어려서부터 성실한 데다 똑똑하고 공부 욕심도 많아서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왔다. 부모님은 아들의 공부 욕심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도록 학원과 과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명문대에 입학하여 부모님에게 ‘돈 쓴 보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졸업 후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기업이라는 K전자에 취업하며 탄탄대로를 걸었고, 언제나처럼 자랑스러운 아들로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흥했다. 또한 취업 후에도 나태해지지 않고 자기 계발에 손을 놓지 않았다.


야근이 없으면 일주일에 세 번은 퇴근 후 영어학원을 다녔고, 주말에는 사내 야구 동호회 회원들과 운동을 즐기며 체력 관리도 놓치지 않았다. 각이 딱딱 맞는 테트리스처럼 짜인 스케줄로 완벽한 사회생활을 해 오던 준호에게 스케줄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현서와의 데이트다.


취업스터디에서 처음 만난 현서는 준호의 눈길을 사로잡은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였으나 계속되는 탈락으로 자신감이 매우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주변을 보니 호감형 외모의 취준생들이 은행에 많이들 취업하는 것 같아 어쩌면 현서에게도 승산이 있을 거란 생각으로 은행에도 원서를 내보는 게 어떠냐며 가볍게 이야기를 던진 적이 있었다. 그 후 현서는 스터디를 나오지 않았고, 준호는 준호대로 취업 후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연애도 하고, 학원도 다니고, 운동도 하면서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신입사원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준호는 현서를 완전히 잊어버렸었다. 그러다 1년쯤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일에만 몰두하던 어느 날, 돈을 이체할 일이 있어 스마트폰뱅킹을 켰는데 OTP카드가 안 켜졌다. 알아보니 은행 영업점에 직접 가서 재발급을 받아야 한다길래 팀장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깐 회사 근처 은행을 들렀다가 현서를 만났다.


현서는 취준생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예뻤다. 은행 창구에서 현서를 보았을 때 사실 너무 반가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준호는 현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굉장히 큰 호감을 갖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현서가 더 이상 스터디를 나오지 않아 아쉬웠었다. 스터디 모임장에게 현서의 연락처를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겨우 두세 번 만나 이야기도 몇 번 안 해본 사이에 따로 연락을 하기엔 좀 쑥스러웠고, 현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그만뒀었다. 그리고 모임장에게 딱 집어 현서의 연락처를 묻기도 좀 그랬다. 남의 번호를 쉽게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취업스터디하러 나와서 여자한테나 찝쩍대는 놈으로 비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취준생 신분에 연애는 사치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접었었다. 그랬던 현서를 3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참 신기했다. 현서는 은행원이 되어있었다.


현서가 준호의 신분증을 받아 컴퓨터에 입력을 하기 시작했다. 


“OTP카드는 토큰형과 카드형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으로 발급해드릴까요?”

“카드형으로 부탁해요, 현서 씨.”


현서가 업무처리를 하는 동안 준호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스쳤다.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 아닐까? 몇 년 전에 짧게 스터디했던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필 이 은행의, 이 지점에서 현서가 내 번호를 호출하다니. 그치만 현서 정도면 분명히 남자친구가 있을 것 같은데. 어쩌지? 번호를 물어봐도 되는 걸까?


아, 내가 너무 반가워하면서 현서 자리에 앉았나? 뒤에 앉아있는 현서 상사 같은 사람이 계속 이 쪽을 쳐다보네. 이름이.. 한철구? 현서랑 나누는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더 이상 사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볼일만 보고 빨리 일어나라고 눈치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현서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데. 이렇게 OTP카드만 받아서 나가기엔 너무 아쉬운데, 어쩌지? 아, 그래!


“현서 씨, 요즘 일은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

“네 뭐 그럭저럭 괜찮아요.”


목소리와 눈빛에 영혼이 없다. 현서는 입가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지만 눈은 동태눈을 하고 모니터를 바라본 채 키보드 버튼을 누르며 준호에게 새 OTP카드를 발급해주고 있었다.


“혹시 실적 같은 거 필요한 건 없어요? 은행 다니는 친구들 보면 가끔 실적 필요하다고 해줄 수 있는지 연락 오던데. 현서 씨는 괜찮아요? 혹시 뭐 도와줄 수 있는 거 있음 얘기해요.”


갑자기 모니터를 바라보던 현서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준호를 향했다.


“어머, 정말요? 실적은 늘 필요해요.”

“뭐 필요해요? 내가 해줄게요.”


현서의 얼굴 전체에 미소가 번졌다. 왼쪽 뺨에 깊이 들어간 보조개가 현서의 미소를 빛나게 했다.

우선 현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듯하다. 뒤에 앉아있는 한철구라는 사람도 모니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 쪽을 바라봤다. 역시 우리의 대화를 계속 듣고 있었어.


“혹시 청약저축이랑 신용카드 해주실 수 있어요? 다른 은행에 청약저축 갖고 계신 것은 없으세요? 청약은 한 은행에만 가입이 가능하거든요.”

“청약 없어요. 오늘 가입하면 되겠네요. 서류 쓸 거 주세요.”


현서의 자리에 갑자기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현서는 필요한 서류를 부산스럽게 챙겨 작성해야 할 부분을 형광펜으로 표시한 후 준호에게 주었다.


“제가 표시한 부분만 작성하시면 돼요. 너무 감사해요. 오늘 귀인을 만났네요.”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에요.”


귀인. 현서가 나에게 귀인이 되면 좋겠는데. 현서가 이렇게 기뻐하니 준호는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청약은 딱히 필요성을 못 느껴서 가입을 안 했었는데, 현서에게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다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뒤에 있는 한철구가 조금 신경 쓰이지만 현서와 얘기를 나눌 시간도 벌었다.


“근데 어떻게 저를 보자마자 바로 알아보셨어요? 스터디했던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현서 씨 보자마자 기억이 바로 나던데요?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그러니까요. 세상 참 좁아요, 그쵸? 그 때 스터디 했던 분들하고는 계속 연락하세요?”

“아뇨. 그 해 하반기 이후에 모임 해체되고 나서는 만날 일이 없었네요.”


현서는 준호와 대화를 하는 동시에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면서 손을 바삐 움직였다. 신분증을 보고 무언가를 입력하더니 뒤에서 통장도 하나 가져왔다.


“지직-지직-지직”


프린터기에서 소리가 나더니 이내 청약통장이 발행되었다.


“여기 사인해주세요.”


현서가 내민 통장 맨 앞장에 준호가 사인을 했다.


“청약계좌 개설 완료되었어요. 확인증에도 나와있지만 인터넷으로도 잔액이랑 자동이체 정보는 전부 확인 가능하세요. 신용카드는 일주일 이내로 작성해주신 주소로 배송될 거예요. 오늘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실적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현서는 사은품을 종이가방에 넣어서 준호에게 챙겨주었다.


“오, 선물도 있네요. 고마워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언제 식사나 같이 해요. 회사도 바로 근처이니.”

“네, 좋아요. 연락 주세요.”


현서의 번호를 받아 핸드폰에 찍고, 현서에게 전화를 걸어 번호를 교환했다. 자연스럽게 번호도 받고 식사 약속도 잡았다. 계좌와 신용카드가 하나씩 더 늘어났지만 이 정도면 성공적인 투자인 것 같다.

준호는 P은행명과 로고가 박힌 종이가방을 흔들며 은행을 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마음이 설렜다. 많이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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