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경단 Oct 11. 2022

안정적이고 화려한 그 이름, 서른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4

서른이 되면 무언가 엄청 달라지거나 심적 변화가 생길 줄 알았는데 20대 후반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서른이에요’라고 말하면 주변에서 약간의 동정심이 담긴 눈빛과 함께 가끔은 ‘이제 너도 꺾였네’라는 말을 들을 뿐이었다.


꺾였다니. 그 얼마나 무례한 표현인가. 난 아직 한창인데. 사실 이제 시작인데.


은행에서 ‘대리’ 타이틀도 달았고, 매년 연봉도 올라가고 있고, 업무적으로 인정도 받고 표창장도 받아 멋모르던 20대 때 보다 훨씬 여유롭고 자신감은 오히려 상승했는데. 이제야 꽃을 피운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는데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나보고 꺾였다고 한다.


이게 보편적으로 사회에서 보는 시선인 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민경은 출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업무도 상당히 익숙해졌고, 은행 내에서 커리어 방향을 정하고 열심히 연수를 듣고 주말이면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자격증도 여러 개 땄다.

지식이 많아지니 손님들을 상담할 때에도 자신감이 넘쳤으며, 이는 자연스레 영업과 마케팅 실력으로 이어졌다.


‘걸어 다니는 규정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정을 머릿속에 넣고 있자니 모두의 신뢰를 받았고, 후배들도 잘 따랐으며, 심지어 가끔은 선배들도 민경에게 도움을 요청해와서 해결해 주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책임자들도 민경을 인정해주었다.


“민경 대리 아니었으면 누가 이렇게 처리할 수 있었겠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말이다. 드디어 나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구나.


한 때는 출근길에 경미한 교통사고가 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었다. 생명이나 뼈에 지장은 없되 인대가 늘어나는 정도 혹은 일주일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정도의 교통사고가 나서 딱 일주일만, 아니면 3일만이라도 출근을 미루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매일 크고 작은 실수들로 은행 창구를 찾은 고객들에게 죄송하다며 머리를 조아리고, 4시에 셔터문을 닫고 나면 팀장님 앞으로 불려 가 오늘의 실수에 대해 반성하고, 영업도 생각처럼 잘 안 되고, 실적은 매일 꼴찌나 뒤에서 두 번째이다 보니 은행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적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직을 하는 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일 건강하게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며 매월 월급을 지불해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부모님도 어디 가면 ‘우리 딸 P은행 다녀요’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수 있고, 월급날이면 가족들과 기분 좋게 외식을 하러 나가 거침없이 카드를 긁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사회 초년생 때에는 비싸다고 생각해서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던 피부과에 정기권을 끊어 피부관리도 다니다 보니 피부에서는 빛이 났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화장이 잘 먹을 때마다 ‘돈 쓴 보람’이 느껴져서 행복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로 꼭 혼자 여행을 다녔다. 패키지나 반패키지 여행은 촌스럽다. 직접 호텔과 비행기를 예약하고 하루하루의 일정만 대강 짜 놓고 세부적인 건 현지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바꾸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다 보면 이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새로운 음식, 멋들어진 풍경, 색다른 경험... 일주일간의 꿀 같은 휴식을 취하고 오면 더욱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소개팅을 통한 두어 번의 의미 없는 짧은 연애와 썸을 거쳐 또다시 솔로가 된 서른 살의 민경은 이제 소개팅이라면 지겨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의 만남보다 나 자신이 더 소중하고 중요함을 깨닫고는 만남을 위한 투자보다 나 자신을 위한 투자가 훨씬 가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주중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나면 주말에는 녹초가 되어 하루는 친구를 만나 조금 비싸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거나 도서관을 갔고, 하루는 집에서 편히 쉬었다. 대개 토요일은 외출, 일요일은 집이었고, 이틀 내내 집에서 꼼짝 않고 있는 날도 있었다.


집이 너무 좋다. 편안하다. 더군다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알고, 유튜브를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니?”


마스크팩을 얹고 방에 누워있는 민경의 이런 편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가 한 마디 던진다.


“그냥 집에서 푹 쉬려고.”

“좀 나가지 그래. 나가서 누구도 만나보고.”

“오늘 약속 없는데?”

“어휴, 집 안에만 있으면 뭐 하냐. 나가서 누구도 만나고 해야 인연도 생기고 결혼도 하고 하는 거지.”

“아빠 내가 알아서 할게!”


서른 줄에 들어선 딸이 혹여나 평생 혼자 살까 걱정이 되는지 아빠는 평소 잘하지 않던 이야기로 민경의 심기를 건드렸다. 아빠의 염려가 이해가 되면서도 난 미래가 창창한 당당한 사회인인데 아빠도 나를 ‘꺾였다’고 보는 것일까 싶어 자신도 모르게 날카롭게 응수했다.


얼마 전에 엄마가 이모와 통화하며 하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민경이 요즘 잘 지내지. 남자 친구? 글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지가 알아서 하겠지 뭐. 은주는 올해 10월에 결혼한다고? 어머 잘 됐네. 축하해~”


부러움이 깃든 엄마의 목소리가 살짝 거슬렸다.


요즘은 다들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이고 결혼 안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저렇게 어른들은 결혼에 집착하는 걸까. 결혼을 해야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난 지금 누구보다 안정적인 심리상태로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대체 결혼이 뭐길래? 꼭 해야 하는 건가? 난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편안하고 좋은데.


주변에서 민경의 연애와 결혼을 걱정해줄수록 결혼에 대해 반감이 들었다. 특히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부모님이 초조해하는 것 같아 보이니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결혼, 하면 하는 거지만 결혼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결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요즘 이혼하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마스크팩을 붙인 채 거실로 나오니 엄마가 사과를 깎고 있었다.


“난 그냥 평생 엄마 아빠 옆에서 살까 싶은데. 그럼 안돼? 요즘은 비혼이 대세야.”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남은 인생 혼자서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외롭니.”
“엄마 아빠가 있는데 내가 왜 혼자야?”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을 순 없으니까.”

“엄마 아빠 세상 뜨고 나면 난 또래 사람들이랑 지내면 돼. 요즘 비혼인 사람들 많아서 아마 나중에 비슷한 처지의 노처녀 노총각들 많을걸? 결혼이라는 건 엄청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생이 바뀌는 시점이잖아? 시간에 쫓겨서 하면 안 된다고.”

“맞는 말이지만 노력은 해 봐야지. 더 나이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의 폭이 확 좁아져. 이렇게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되잖니.”


그놈의 나이, 나이, 나이...

엄마도 내가 꺾였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내가 지난 몇 년간 얼마나 처절하게 인연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나도 너무 늦은 나이엔 결혼이 쉽지 않다는 사실 쯤은 그렇게 집어서 얘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고요. 근데 쉽지 않은 걸 어떡하나요.


난 지금 연애에 대해 번아웃 상태인데 엄마가 아예 찬물을 들이부으며 비혼으로 몰고 있다. 원래 비혼 주의자는 아니었는데. 사실 지금도 아닌데.


“아 몰라. 인연이 나타나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뭐. 결혼 안 해도 멋지게 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자신의 속도 모르고 연애와 결혼을 재촉하는 엄마가 괜스레 밉다. 왠지 못난 딸이 된 것만 같아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나가서 자취를 해볼까?

일단 부모님 눈에 안 띄면 잔소리 들을 일도 없고, 부모님도 집에서 누워만 있는 딸이 안 보이니 걱정이 덜할 것이다. 밖에서 누군가라도 만나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작은 방 하나 정도는 구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직방 앱을 켜서 회사 근처 원룸을 알아봤다.

온전한 집도 아니고 원룸인데 시세가 이렇게 비쌌나? 

조금 깨끗해 보인다 싶은 오피스텔은 전세가 1억 5천이 훌쩍 넘었고, 특히 회사로 도보 출근이 가능한 곳은 2억 가까이 되었다. 1억 이하의 방을 찾다 보니 회사에서 점점 멀어졌고, 출근이 50분 가까이 걸리는 곳만 보였다. 지금은 지하철로 25분이면 되는데... 의미가 없었다. 돈은 돈대로 나가고, 출퇴근은 출퇴근대로 빡세면 이건 계산이 맞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 최대한 부모님과 타협하며 지내는 수밖에.


여행이나 가자.

올해 휴가 계획은 아직 안 세웠는데, 3일 정도만 휴가를 쓰고 주말 껴서 가까운데 어디라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행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4박 5일로 여유 있게 다녀올만한 곳. 단연코 일본이다.

오키나와로 가자!

몇 년 전 어느 드라마에서 오키나와는 동양의 하와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곧바로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다.


이것이야말로 화려한 싱글 아니겠는가!

내가 원하는 때에 바로 떠날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란! 아, 정말 좋다!


민경은 또다시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며 오키나와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엄마와 나눴던 대화나 결혼에 대한 스트레스는 하얗게 잊혀졌다.

이전 11화 능력 있는 남자와의 결혼이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