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찹쌀경단 Oct 24. 2022

능력 있는 남자와의 결혼이란

P은행 지현서 계장의 이야기 08

준호와 연애를 한 지 1년이 넘었고, 현서는 서른이 되었다.


준호는 다정다감한 스타일이었다. 현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서울에서 혼자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현서에게 커다란 나무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 현서는 이제 서울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은행원으로서도 자리를 잡아갔다. 필수 자격증도 대부분 땄고, 업무도 점점 익숙해졌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손님을 유연하게 대처하는 법도 터득했고, 매일 마감하며 맞추는 시재가 틀리는 날도 거의 없어졌다. 그렇지만 전 직원 앞에서 체크하는 실적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실적 압박만 빼면 좀 나을 텐데.


“현서야, 엄마가 말했잖아. 서른 전에는 결혼해야 한다고. 늦어도 서른을 넘기지는 말아야지. 너 진짜 만나는 사람 없어? 엄마가 주변에 좀 알아볼까?”

“괜찮아, 엄마. 나 요즘 너무 바빠서.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는 결혼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난 1년간 준호와 사귀면서 엄마에게는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없다고 둘러댔었다. K전자에 다닌다는 준호의 이야기를 들으면 실망하며 뭐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원하는 사위의 직업은 전문직이다. 엄마도, 주변에서도 늘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고, 현서도 처음엔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곧 ‘재력’이고, 이것은 보통 의사, 변호사, 회계사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남자들을 말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현서는 두어 번의 ‘전문직 남성’과의 소개팅 후, 마음을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현서가 만난 전문직 남성들은 어째 패턴이 비슷했다. 처음엔 현서의 외모에 대한 칭찬과 과도한 친절로 시작하여 당연히 현서가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거만함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딱히 잘생기지도 않았는데(사실 못 생긴 쪽에 가까웠는데) 그놈의 전문직이라는 ‘사짜’ 타이틀이 주는 넘치는 자부심이 현서를 주눅 들게 했다. 기분이 상했음은 물론이다.


“원래 잘난 남자들은 그럴 수 있어. 대신 결혼하면 너 은행 안 다녀도 되고, 편하게 살 수 있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어야지.”


엄마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서 선자리 알아봐 주겠다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우선은 준호의 존재를 숨기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엄마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준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냄에 따라 현서는 엄마에게 준호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고, 준호에게서 발견한 새로운 매력이 아마 엄마의 사윗감에 대한 기대치를 만족시킬 것이라 확신했다. 전문직이 아니어도 엄마는 꽤 만족할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준호 부모님의 재력이었다.


현서는 준호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그 주 주말에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 나 사실 남자 친구가 있어. 만난 지 좀 됐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야 말하게 됐어.”

“지지배, 그럼 그렇지. 왜 말을 안 했어. 엄마 괜히 걱정했잖아.”

“엄마 딸이 설마 이렇게 쭉 남자 친구 없이 지냈을까 봐?”

“그래, 말해봐. 어떤 사람이야?”

“이름은 이준호고, 똑똑하고 착해. 편안한 스타일이야. 회사는 K전자 다녀. 나보다 세 살 많고. 취업스터디할 때 알고 지냈던 사람이야.”


엄마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넌 뭘 모르는구나 싶은 표정을 지었다.


“K전자? 음 그래? 좋은 데 다니네. 근데 현서야, 엄마가 말했잖아. 능력을 봐야 한다고. K전자라고 해봤자 회사원에 불과해. 여자는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게 중요해.”


역시. 엄마의 이런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다. K전자도 사실 굉장히 좋은데. 나보다 연봉도 높고.


“K전자면 훌륭하지, 엄마. 연봉도 되게 높아.”

“그래도 전문직종이 좋지. 잘릴 위험 없지, 돈도 많이 벌지. 회사원은 비교가 안 되지.”

“그렇긴 한데, 사실 전문직인 사람들과 연이 안 닿더라구. 결혼은 뭐 나 혼자 하나?”

“왜 연이 안 닿아. 엄마가 누구 소개라도 받아올까?”

“아니야. 됐어, 엄마. 난 준호오빠가 좋아. 엄마도 좋아할 거야. 정말 괜찮은 사람이거든. 그리고 결혼하면 부모님이 서울에 있는 40평대 아파트 해주신다고 했대.”

“40평대 아파트?”


엄마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펴지고 눈이 동그래졌다.


“여유가 꽤 있으신가 보네?”

“그런가 봐. 사업을 좀 크게 하신대.”

“학교는 어디 나왔고? 몇 살이라고 했지? 너보다 세 살 많으면 서른셋이네? 너네 결혼 얘기까지 한 거야? 얼마나 만났는데? 어디, 사진 있으면 좀 봐봐.”


엄마는 갑자기 준호에 대해 궁금한 점을 와다다다 쏟아냈다.


“엄마도 한번 만나봐야겠다. 엄마가 다음 주에 서울로 한번 갈까?”

“응 뭐, 그래도 되고.”


엄마는 일단 준호가 재력가의 아들인 것 같으니 전문직이 아닌 것에 대한 아쉬움을 한시름 내려놓은 듯했다. 


엄마 딸, 뭣도 모르는 애 아니거든.


사실 현서도 준호네가 여유 있는 집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준호 자체도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여유까지 있으니 결혼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모님에게 소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한 것이었다. 가치관에 차이가 있을 순 있지만 없이 시작하는 것보단 뭐라도 있고 시작하는 것이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니까. 남들이 뭐라 하든 둘이 좋으면 되는 거니까. 속물이라고 욕한다면, 그것은 보통 부러워서 하는 소리다. 현서는 워낙 주변의 여자들에게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아온 경험이 많아서 여유 있는 집안 아들이랑 연애한다는 것도 굳이 지인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문득, 우연히 은행에서 준호를 만났던 날이 생각났다. 그래서 청약저축이 없었구나.

준호가 현서에게 청약저축이 없다고 말했을 때 현서는 좀 의아해했다. 청약저축은 보유기간도 중요하기 때문에 요즘은 대학생 때부터 많이 가입하는 추세인데. 더군다나 준호같이 스마트한 청년들은 미리 알아보고 진작에 가입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준호는 청약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주 뒤, 엄마는 당장 서울로 올라와서 현서와 준호와 저녁을 함께 했다. 준호는 고급스럽고 깔끔한 식당을 미리 예약해 뒀고, 약간 긴장된 모습으로 등장했지만 예쁜 꽃다발을 준비하는 센스를 발휘해서 엄마를 감동시켰다. 식사시간은 화기애애했고, 엄마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2주 후, 이번에는 준호가 현서를 부모님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 현서는 엄마가 준비해준 홍삼세트를 들고 갔고, 준호의 부모님은 예쁘고 참해 보이는 현서를 맘에 들어했다. 각자의 부모님을 만나고 나니 웬걸.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상견례 날짜가 잡혔다. 현서는 한 번에 음식이 다 나오는 것보다는 코스요리가 좋다는 결혼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코스요리가 나오는 조용한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처음 만나는 서로의 가족들이 초반에야 반갑게 인사를 나누더라도 중간중간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순간들이 생기는데, 그때마다 “요리 나왔습니다” 하며 방으로 들어오는 종업원들이 적막을 깨 주며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따님이 어쩜 이렇게 참하고 예뻐요. 우리 준호가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 오늘 보니 엄마를 닮아서 예쁜가 보네요.”

“어머, 호호. 우리 현서가 좀 예쁘긴 하죠? 미인대회 권유도 받았었어요. 저는 아드님 보고 제가 반했잖아요. 어쩜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셨는지. 비법이 궁금하더라고요.”


엄마들은 상견례 대화법을 연습이라도 하고 온 걸까? 유튜브에 나와있나?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글거리는 멘트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다니. 현서는 준호와 마주 보며 입술을 씰룩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 결혼하면 집은 저희가 준비해주겠습니다. 저희 때와는 달리 요즘같이 취업도 힘들고 결혼도 안 하는 시대에 직장도 탄탄하게 잡고 결혼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대견해요. 저희가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습니다.”


상견례 자리가 무르익고, 준호의 아버지가 얘기를 꺼냈다.


“예비사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너무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혼수는 저희가 섭섭지 않게 잘 준비해보겠습니다. “


덕담이 오고 가고, 집과 혼수 이야기가 나오고, 할 말이 없어졌을 때쯤 종업원들이 들어와 빈 그릇을 치우며 새로운 요리로 세팅을 해 주고, 결혼 날짜는 현서와 준호가 식장을 둘러본 후 정하는 것으로 하고, 얼린 홍시와 수정과를 디저트로 상견례가 마무리되었다.


나, 진짜 결혼하는 건가? 상견례가 끝나자 결혼을 한다는 게 확 와닿았다.

이전 10화 동태눈이 초롱초롱해지는 마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