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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13. 2022

혹시나 했지만 담백 깔끔!

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5

동양의 하와이는 조금 오버다.

물론 하와이를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의 수식어를 붙일 정도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다들 극찬하는 하와이가 이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다) 오키나와의 거리를 걸었다. 


아마 동양의 하와이란 말이 나온 이유는 과거에 미국이 오키나와를 통치하던 기간이 있어서 일본 본토와는 조금 다른 문화와 분위기를 갖고 있어서 일 것이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굳이 그런 수식어가 없어도 나름의 매력이 충분한 여행지였다.


바다도 예쁘고, 음식도 맛있고-특히 미국의 영향으로 맛있는 스테이크 집이 많다는 글을 보았다, 화려하기보단 잔잔하면서 휴식을 취하기 좋은 곳이었다. 자색고구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관광객들을 향해 호객행위를 하는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구경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일본 특유의 감성이 묻어 나오는 작은 인형들, 처음 보는 일본 과자들, 작은 기념품들까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진도 열심히 찍고 이것저것 샀다.


저녁은 미리 조사해 둔 회전초밥집을 가기로 했다. 일본에 왔으면 단연코 초밥은 여러 끼니를 먹어줘야 한다.

조금은 낡은 듯한 인테리어의 아담한 규모의 초밥집 안에 들어가니 한눈에 봐도 장인인 듯한 할아버지 두 명이 초밥을 만들고 있었고, 외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인 가족 한 팀과 일본인 연인, 그리고 젊은 일본 남자 한 명이 전부였다.


여기는 찐이다!


일본 남자 옆에 자리를 하나 띄워 두고 앉았다. 돌아가는 레일 위에는 두툼한 회가 올라간 각종 초밥들이 민경의 입맛을 당겼다.


우선 참치 뱃살 스시 한 조각을 내렸다.

적당히 기름지고 고소한데 입 안 가득 채우는 참치 살!

아, 정말 이런 게 행복인가 싶어 민경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참치 뱃살 스시는 한번 더 먹어야겠다.


다음은 이쿠라 스시다!

탱글탱글한 연어 알이 톡톡 터지는 맛은 상큼하다 못해 민경의 기분까지 팡팡 터뜨려주었다.

한국에서 먹는 스시와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에 가격은 훨씬 저렴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현지 음식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지.


또 무얼 먹을까 고민하며 레일을 바라보던 민경은 옆에 있는 일본 남자는 무엇을 먹나 지켜보았더니, 그 남자는 구운 연어가 올라간 스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래, 현지인이 먹는 스시는 또 맛을 봐야지.


민경도 같은 스시를 내렸다.

생 연어가 올라간 스시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토치로 살짝 달군 것인지 연어는 따뜻하면서 고소했고, 생강 초절임을 먹으며 다음 스시를 내렸다.


계란말이로 만찬을 마무리하고 적당히 배가 부른 민경은 숙소로 돌아가는 열차 편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어? 분명히 아까 까지는 잘 작동했는데, 현지 유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인터넷이 안 터졌다.

큰일이다. 짧은 여행이라 핸드폰만 믿고 가이드북도 안 사 왔는데. 숙소로 가는 법을 모르는데 어떡하지?

핸드폰을 껐다 켜 보았다. 노 시그널이라는 표시만 뜬다.


크게 당황한 민경은 카운터로 가서 초밥집 직원에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었다.


“Can I get your WiFi password?”

“에? 잉글리시 노.. 노..."


영어라면 자신 있는 민경이라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영어에 자신 없어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와이파이. 와이파이. 인터넷. 마이 폰, 인터넷 노 워킹.”


최대한 단어를 끊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자 했으나, 일본인 직원은 난감하다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라면 숙소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택시를 타야 하나? 근데 일본은 택시비가 살인적이라고 들었는데. 일본은 카드를 잘 안 쓴다니 환전한 거 전부 택시비에 쓰는 거 아냐? 그리고 외국에서 이 밤에 여자 혼자 택시라니, 그건 좀 많이 위험하잖아. 이상한 데로 끌려가면 어쩌려고? 이것 참 난감하네. 아까 교통편을 미리 알아보고 캡처를 해 놓을 걸.


후회가 밀려왔다. 인터넷이 없으니 마치 오지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다. 어쩜 이렇게 인터넷 의존적인가. 가끔은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가이드북이라도 사 올 걸. 요즘 누가 촌스럽게 가이드북을 사냐며 코웃음 치던 과거의 자신을 질책한다.


“저 혹시.. 도움이 필요하실까요?”


등 뒤에서 눈물 날만큼 반가운 한국어가 들려왔다. 아까 옆에서 구운 연어 초밥을 먹던 일본 남자다.


“아... 저.. 핸드폰이 인터넷이 안 되어서요. 아까 낮에는 잘 썼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는지 인터넷이 안 잡히네요. 숙소로 가는 길을 알아봐야 하는데. 혹시 식당에 와이파이 되면 좀 쓰려고 물어보고 있었거든요.”


그 남자는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인 직원과 뭐라 뭐라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한국처럼 와이파이가 곳곳에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곳이 많아서요. 여기도 따로 없다고 하네요. 급히 필요하시면 제 핸드폰 잠깐 빌려드릴까요?”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한 줄기의 빛이 내린 것 같았다. 민경은 그 남자의 핸드폰을 이용하여 구글 맵에서 숙소명을 찍고, 열차 편을 확인했다. 식당에서 전철역으로 가는 길도 확인하여 핸드폰 카메라로 세세하게 찍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불편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일본 분이신 줄 알았어요.”

“아, 저 한국사람이에요.”


그 남자의 이름은 박재훈이라고 했고, 오사카로 출장을 온 김에 휴가를 붙여 오키나와에 잠깐 들렀다가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떠난다고 했다.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 숙소 못 돌아가는 줄 알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니에요. 그나저나, 숙소에서는 와이파이 되는 거죠? 유심 회사에 문의해보셔야겠어요.”

“네, 가자마자 확인해보려고요. 내일 바로 한국으로 가신다니, 괜찮으시면 제가 한국 가서 식사 대접할게요.”

“아 괜찮아요. 이 정도 가지고 뭘요.”

“아니에요. 저 때문에 시간도 많이 허비하셨는데...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번호 주시면 제가 한국 가서 연락드릴게요. 비싼 밥 한번 살게요. 진짜예요.”


거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데, 비싼 밥 정도야 당연히 살 수 있다. 이렇게 나의 고마움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여유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조금은 억지로 재훈의 번호를 받아 입력하고, 민경은 그렇게 숙소로 향했다.


이틀을 더 머물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터넷 때문에 잠시 패닉이었지만, 유심 회사의 대처 덕분에 어찌어찌 해결이 되어 남은 여행을 순조롭게 끝냈다.


휴가가 끝남에 아쉬운 마음을 가득 품고 출근했다. 곧바로 재훈에게 카톡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 오키나와에서 도움받았던 최민경이예요. 그날 정말 감사했어요. 제가 식사 대접한다고 했잖아요. 빈말 아니에요. 맛있는 거 살게요. 시간 언제 괜찮으세요?’

‘안녕하세요. 다행히 여행은 무사히 마치셨나 봐요. 제가 지금 회의가 있어서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진짜로 회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 친구가 있어서 낯선 여자와 단둘이 식사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재훈과의 카톡은 꾸준히 이어지지 않았다.


하긴, 나와 별로 밥을 먹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다시 한번 물어보고 반응이 미적지근하면 그냥 기프티콘이나 보내야겠다. 고마우면 성의 표시를 할 것이지, 말로만 밥 사겠다고 공수표 날리는 인간들을 제일 싫어하니까 나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다.


민경의 카톡이 오래도록 1이 없어지지 않자 민경은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기프티콘을 하나 보냈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혹시 부담스러우시거나 시간 내기 어려우시면 어쩔 수 없죠. 전 꼭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 그날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재훈에게서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답장이 늦어 너무 죄송해요. 요 며칠 해외에서 손님들이 와서 회의가 있었거든요. 회의 준비하고, 참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이렇게 안 하셔도 되는데.. 케이크는 잘 먹을게요. 고맙습니다.’


담백 깔끔하다.

혹시나 하고 1% 정도 기대했던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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