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은행 다니는 직장여성 최민경입니다 06
오키나와에서 먹었던 스시 사진을 이리저리 필터를 이용해 맛깔나게 편집해서 카톡 프로필 배경으로 바꿔 두었다. 그리고 8시 20분까지 출근하고, 4시에 셔터 닫고, 6시에 퇴근하는 평범한 은행원으로서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이 많은 날엔 아예 저녁을 먹고 9시쯤 퇴근하기도 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재훈에게서 카톡이 왔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난주에는 너무 바빴어서요. 케이크 맛있게 잘 먹었어요. 괜찮으시면 주말에 식사 한번 해요. 이번주는 좀 여유가 있네요.^^’
오?
딱히 내가 엄청 부담스러운건 아니었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토요일 저녁 약속을 잡았다. 재훈이 가끔 가는 스시집이라며 주소를 보내왔다.
소개팅은 아니지만 파스타집이 아닌 저녁 약속임이 무의식적으로 기뻤다. 문득, 수많은 소개팅과 함께한 물리고 물린 파스타를 먹은 지 시간이 꽤 지났음을 느꼈다.
이번 토요일은 민경이 오피스텔 분양 집단대출 서류를 받으러 나가게 된 날이었다. 팀장님을 포함하여 지점에서 4명이 토요일에 출근하여 집단대출 서류를 받기로 했는데, 민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속시간은 저녁이니 끝나고 가면 문제없겠지 싶었는데, 예정보다 늦게 끝나고 말았다.
‘저.. 죄송해요. 오늘 회사에 일이 있어서 출근했는데, 일이 좀 늦게 끝나서 30분정도 늦을 것 같아요. 최대한 빨리 갈게요.’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은인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주제에 약속시간에 늦기까지 하다니. 일 때문이니 어쩔 방도가 없었지만 이렇게 죄송함을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 참 싫다. 심지어 얼굴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너무 무례해 보이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저 지금 지하철에서 내렸어요. 바로 올라가요.’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오자 흰 피부에 선한 인상의 재훈이 웃으며 민경을 맞이했다. 거의 40분을 늦었는데 웃으며 인사를 해 주어 마음이 놓였다. 사실 심쿵했다.
“회사에서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해요. 너무 늦었네요.”
“괜찮아요. 오늘 출근하셨나봐요? 은행에서도 토요일에 출근하는 날이 있어요?”
“네. 토요일 출근은 흔치 않은데 자세한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해드릴게요. 하루종일 일 했더니 배고프네요.”
“이 쪽이에요. 가시죠.”
본토에서 먹은 스시와는 당연히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가격도 저렴한 편에 깔끔했다.
“스시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여기로 예약했는데, 괜찮으세요?”
“네 저 스시 되게 좋아하는데, 여기 맛있네요!”
밥을 먹으며 편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느 학교를 나왔고, 전공은 뭐고, 어느 회사에 다니고, 몇 년차 직장인이고... 이 나이 대의 직장인들이 처음 만나면 자연스레 꺼내지는 이야기들. 초면같은 구면이지만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니 서로에 대한 소개가 길어졌다.
재훈은 민경보다 한 살이 많았다. 일본 회사에서 2년정도 일 하다가 한국의 회사로 이직한 지 몇 년 되었다고 했다.
“요즘 관심사는 뭐에요?”
“저는 재테크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아끼고, 모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안 좋게 말하면 짠돌이라고 할까. 하하.”
사람이 참 솔직하다. 스스로를 짠돌이라고 말하다니. 요즘은 보통 없어도 있는 척, 있으면 더 있는 척하려고 하지 자신을 짠돌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나? 만난지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굉장히 편한가보다. 내가 딱히 이성으로써의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말할 리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자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민경도 재훈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저런 속 얘기도 하고, 은행 얘기, 취미생활 얘기, 과거의 소개팅 얘기...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은, 민경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책 읽기 좋아하는 것, 그 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것, 외국어에 관심 많은 것, 여행 좋아하는 것, 새로운 것에 도전하길 좋아하는 것, 나중엔 주재원으로 해외지사로 나가서 근무하고 싶어하는 것... 공통된 관심사가 많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참 오랜만인데, 나에게 딱히 관심은 없어 보여 아쉽네. 대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가끔 속마음도 털어놓고 고민 상담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친구. 이것도 인연인데!
재훈이 케이크 잘 먹었다며 밥을 샀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어느새 10시가 훌쩍 넘어갔다. 둘은 무려 4시간가량 쉬지 않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제가 식사 대접하려고 했는데, 잘 먹었어요. 여러모로 감사했구요.”
“덕분에 저도 잘 먹었네요. 우리 또 봐요.”
“네 그래요. 편하고 좋은 오빠 생긴 것 같아서 좋네요.”
“아뇨, 다음에 우리 데이트해요.”
데이트?
갑자기 민경의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