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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경단 Oct 06. 2022

새 운동화와 남편의 잔소리

오랜만에 소비 좀 했는데, 왜! 뭐!

9월엔 내 생일이 있었다.


세 달이 채 되지 않은 아기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다 보니 제일 싱겁게 지나간 생일인 것 같다.

나 조차도 내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이렇게 아기 엄마가 되어가는 건가 싶어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건 각종 쇼핑몰에서 지급해주는 생일 축하 쿠폰들.


임신 전엔 힙하고 패셔너블해서 자주 들어가던 패션 앱이 있는데 임신과 출산을 하고 나니 신기하게도 패션에 관심이 뚝 떨어졌다. (일시적인 것이라 믿고 싶다)


자주 들락거렸던 한 패션 앱에 5만 원 이상 구매 시 2만 원 할인쿠폰이 생일 쿠폰으로 들어와 있었고, 그 덕에 오랜만에 (거진 1년 만에!) 들어가서 구경을 했다.


왠지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이 성의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아기는 침샘이 발달해서 침을 많이 흘리는데, 나는 늘 아기 침 범벅이고 트름시킬 때 가끔 게워내는 하얀 토가 거의 매일 어깨에 묻다 보니 내 옷은 늘 입던 낡은 티셔츠나 원피스다.

그러다 보니 옷에는 눈이 가지 않았다. 패션 트렌드가 워낙 빠르게 바뀌는지라 요즘은 뭘 입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지난 1년간 나는 임부용으로 나온 고무줄 바지나 원피스만 입고 살았기에.


그리고 복직하기 전 까진 그다지 패셔너블하고 고가의 옷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고가의 옷이라고 해봤자 오만 원 넘어가면 고민하고, 십만 원 넘어가는 옷은 잘 사는 스타일이 아님을 밝혀둔다 – 아우터 제외!)


옷은 복직할 때쯤 그때 트렌드에 맞춰 골라보면 되고, 지금 나를 위해 사볼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구경하다가 신발을 보았다.

가을 겨울에 맞춰 멋스러운 굽 높은 부츠들이 보였다.


내가 부츠를 신고 아기랑 밖에 돌아다닐 일이 있을까?

출산 후 아직 조금만 서 있어도 무릎이 아픈데... 굽? 무리다.

그럼.. 역시 운동화다.


나는 원래도 운동화를 좋아했다.

출근할 때는 회사에 신고 가도 무리 없는 가죽 스니커즈를 즐겨 신고, 구두를 신어야 하는 날이면 운동화를 신고 출근해서 구두로 갈아 신고는 했다.

주말에 외출할 때에도 운동화를 매치해서 입었다. 편하고 적당히 패셔너블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나의 유일한 외출인 아기와 병원 갈 때에도 당연히 운동화다. 아기 안고 다른 신발은 생각할 수가 없다.


꼭 필요해서 (없어서) 사는 게 아니고 나름 사치성으로 사는 거다 보니 굳이 비싼 건 사고 싶지 않았다.

생일 쿠폰을 쓸 수 있는 5만 원만 살짝 넘기면 된다.


가격 낮은 순으로 정렬도 해 보고, 인기도순으로 정렬도 해 보며 찬찬히 구경하다 마음에 쏙 드는 운동화를 찾았다. 8만 원선의 운동화였는데 평도 좋고, 나에게 없는 색감의 제품이었다.

어디에나 매치하기 편할 것 같은 베이지색. 


이거다!


쿠폰을 먹이고 그동안 앱에 쌓아둔 포인트 2만 7천점에 다른 포인트까지 다 끌어서 쓰니 가격이 2만 5천 원으로 내려왔다.


와우! 이거야말로 합리적인 소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요즘 내가 사는 거라곤 아기 기저귀, 젖병, 아기 옷, 식료품뿐이었는데 오랜만에 나를 위한 물건을 샀다.

택배가 매우 기다려졌는데 하필 주말이 껴 있어서 평소보다 3일은 늦게 온 것 같다.


어제 드디어 운동화가 도착했다.

효자인 우리 아기는 엄마가 택배를 뜯어보는 동안 침대에서 조용히 잠을 잤다. 고맙게도.


신발을 신어보니 너무 맘에 들었다. 발도 편하고, 색감도 예뻤다.

신을 신고 거울 앞에 이리저리 비춰보고 신발끈도 내 발에 맞게 조정했다.

옛날 같았으면 옷도 꺼내서 입어보고 매치하며 좋아했을 텐데, 아직 살이 다 빠지지 않아 바지가 맞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실내복에 신발만 신고 거울 앞을 왔다 갔다 했지만 오랜만에 기분전환이 되는 것 같았다.



남편이 퇴근하고 왔다.

철저한 분리수거 원칙을 갖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분리수거 날 쓰레기를 전담해서 버려주는 가정적이고 고마운 남편.

남편이 택배 상자를 보았다.


“이거 뭐야? 운동화 샀어?”

“아, 응! 얼마 전에 말했던 생일 쿠폰 써서 아주 잘 샀지!”


패션엔 영 관심이 없고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사실 좀 짠돌이임) 남편인지라 나도 모르게 쿠폰 써서 저렴하게 샀다는 부분을 어필했다.

남편이 나를 째려봤다. 분명히 째려봤다.


“운동화 많은데 무슨 운동화를 또 사. 남편 신발이나 하나 사 주지.”


운동화 안 많다. 지금 가서 세어보니 다섯 켤레 있다.

(누군가의 기준에선 많다면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하지만 각자 색깔과 스타일이 다 달라서 쓰임새도 다르다!)


울컥했다.


“왜? 난 집에서 애나 보고 밖에 나갈 일도 없는데 일하러 나가는 자기 꺼나 사주지 왜 내 걸 샀냐 이거야? 오랜만에 나를 위한 소비 좀 했는데 그게 이렇게 잔소리 들을 일이야?”


와다다다 쏴 붙였다.


“내가 몇십만 원을 썼어? 쿠폰 먹여서 2만 5천 원짜리 운동화 하나 샀는데 이게 그렇게 눈치 봐야 할 일이야?”

“아니,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화 있는데 왜 또 샀냐 이거지.”


금액이 문제 맞다. 쿠폰을 먹였든 안 먹였든 그건 중요치 않다. 안 샀으면 안 썼을 돈을 썼다는 데에 삔또가 나갔을 것이다. 그것도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데에. 운동화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니, 나 베이지색 운동화는 없다고. 없는 물건 산 거 맞는데.


“나 휴직 들어온 지 6개월도 안 되어서 아직 급여 나오고 있는데도 2만 원짜리 운동화 산 걸로 이렇게 잔소리 듣고 눈치 봐야 해? 급여 안 나오기 시작하면 어디 무서워서 뭐라도 사겠어? 생활비 달라고 얘기나 할 수 있겠어? 혹시 내 카드 내역 일일이 조사하는 거 아니야?”


정확히는 2만 5천원이지만 2만원이라고 좀 내려서 말했다. 그래야 나한테 조금 더 유리할 것 같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차피 둘 다 2만원대인건 맞으니.


“그렇게 하기만 해 봐. 나 당장 회사에 연락해서 복직할 거니까 아기는 오빠가 보던지, 기관 알아봐서 보내던지, 알아서 해!


한없이 사랑스럽고 아까운 내 아기를 인질 삼아 협박을 한 것 같아 마음속으로 굉장히 미안했지만, 사회생활도 못 하고 세상과 단절되어 매일 아기 똥이나 치우고 아기 먹이느라 점심은 2시 반쯤 대강 냉동 볶음밥을 데워서 허겁지겁 먹는 내 처지가 불쌍해서, 이런 나의 노고를 몰라주는 것 같은(설마? 아니겠지?) 남편에게 분노가 치밀어서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평소 아기도 잘 보고, 돈도 열심히 벌고, 청소도 빨래도 잘하는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임을 밝혀둔다. 젖병 열탕 소독은 남편이 매일 하고, 아기 똥기저귀 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전담하고 있으며, 주말 아침이면 제일 먼저 청소기를 돌리며 상쾌한 하루를 열어주는 고마운 남편. 나는 많은 순간을 결혼 잘했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우리는 개그 코드도 잘 맞고 말이 엄청 잘 통해서 수다 떠는 게 제일 즐거운 사이좋은 부부다. 남편이 내 브런치를 보기 때문에 마지막에 급히 덧붙이는 것은 절대 아님!)


“미안...”


아차 싶었는지 남편이 멋쩍은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일단은 일단락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결심했다.


절대 일을 그만두지 않으리라!

열심히 일 해서 번 돈으로 가정경제에 기여도 하고 쇼핑도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하리라!

세련된 옷에 오늘 산 운동화를 매치해서 비즈니스 캐주얼로 빼입고 다시 회사로 나가리라!


부디 복직할 때쯤 주변 환경과 여건이 잘 도와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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