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나는 말이 빨랐다고 했다.
한돌이 되었을 때부터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해서 동네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고 했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을 수 있다. "얘 천재 아냐?"의 시기였을 테니!)
걷기 시작한 후로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른들을 흉내 내며 이건 뭔지, 얼마인지 물어보며 관심받는 것을 즐겼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고, 말하는 거라면 자신 있었다.
'말발' 세다는 말을 종종 들었고, 학교에서 토론을 할 때면 우리 팀이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은 육아휴직 중이지만
나는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열심히 하는 입장이다.
막힘없이 대화를 하고, 설명을 하고, 그 와중에 신뢰감도 필요하다.
하루 종일 열심히 말하다 보면 퇴근 즈음에는 지치고, 집에 와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하고 싶고, 즐거운 말만 하고 싶고, 듣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은 입에서 말이 조리 있게 잘 나오지 않는다.
하루 종일 하는 말이라곤,
"맘마 먹을까~?"
"우리 아기, 응가했어? 기저귀 갈아줄까?"
"엄마 여기 있어~ 왜 울어~"
"아이 좋아. 배 부르니 기분 좋아?"
"누구 아들이야~ 이렇게 귀엽고~"
이 정도의 반복인 것 같다.
나열해 보니 다섯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것밖에 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믿기 힘들다!)
상호작용이 이뤄지지 않는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말들.
대화가 아닌 그냥 내뱉는 말들.
아기에게 말할 때 쓰는 문장 이외의 아예 새로운 말을 하려고 들면
가끔 말이 입 안에서 맴돌거나 우물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단어도 생각이 안 나서 '이거' '저거'로 대신할 때도 많다.
주말인 오늘 아침엔 남편과 느지막이 아점을 먹던 중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보다가
'아, 날씨 참 좋다. 이따가 아기 유모차에 태워서 놀이터나 가볼까?'라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근데 105동 앞 놀이터는 바람 쐬러 나가기에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좀 멀리 가자."
"응? 갑자기 웬 놀이터?"
"아니, 아기랑 밖에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무슨 놀이터 얘기를 언제 했는데?"
토스트 위에 구운 토마토를 올려 야무지게 먹으려던 남편은 내가 뜬금없이 꺼낸 놀이터 얘기에 황당해했다.
세상에.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남편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라 착각했다.
하루 종일 아기에게 말 거는 것 말고는
나머지는 늘 마음속으로 혼자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과 말을 혼동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착각을?
대화의 방법을 잃어버리고 있다.
말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역시 언어란 반복해서 쓰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아, 서글프다.
이렇게 말도 잃고, 사회성도 잃어버리는 걸까?
너무 바뀌어버린 나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조금씩 느끼고는 있었는데,
남편과 대화를 할 때 말이 버벅거리며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조짐이 보였었는데,
애써 무시해왔는데 오늘 아침에 터져버렸다.
차라리 우리 아기처럼 그냥 울고만 싶다.
우는 게 유일한 말인 우리 아기처럼 그냥 단순하게 울음으로 모든 걸 표현하고 싶다.
그러면 말을 잃어버려 슬픈 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텐데.
(아닌가? 우리 아기도 다양하게 울고 있는데 초보 엄마인 내가 못 알아차리는 걸까?)
여하튼,
말을 열심히 해야겠다.
하루 종일 나의 짝꿍인 아기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아기에게도 열심히 말을 해야겠다.
안 그러면 혀가 굳어버릴 것 같으니까.
그리고 아기가 좀 크면 (조만간! 부디!)
주말에 약속이라도 잡아 밖에 나가 또래의 친구들과 열심히 수다를 떨어야겠다.
안 그래도 요즘 회사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친하게 지냈던 회사 언니랑 밥도 먹고 카페도 가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말을 잃어버리지 않는 연습,
해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