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이게 육아 카테고리에?
"난 가지가 싫어. 색깔부터 거부감이 들고, 고무를 씹었는데 물컹한 느낌이잖아. 너무 싫어."
"어렸을 때 아침마다 엄마가 갈아주시던 토마토 주스가 너무 싫었어. 설탕이나 꿀도 안 타서 밍밍한데, 제대로 안 갈려서 가끔 덩어리도 씹힌단 말이지. 아침부터 잘 넘어가지도 않는 주스 마시는 게 곤욕이었어. 토마토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과일이야. 아, 과일이 아니라 채소인가?"
"나물반찬은 최악이라고 생각해. 만들어서 바로 먹는 건 괜찮은데 냉장고에 넣고 이삼일만 지나도 나물에서 물이 나오잖아? 그 축축한 반찬을 먹는 게 너무 싫어."
"한국인이라고 무조건 김치를 좋아해야 해? 난 김치가 싫어. 맵고, 짜고. 안 먹고 싶었는데 늘 식판 한쪽엔 김치가 있어서 식판 자리가 아까웠어."
거 참, 싫어하는 것도 많고 그 이유도 구체적이다.
연애할 땐 매운 것을 싫어한다는 정도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음식(혹은 식재료)과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사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신혼 때, 먼저 퇴근해서 여러 재료들을 넣고 카레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참고로 나는 요리를, 남편은 설거지를 담당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카레는 '카레여왕 구운 마늘 맛'인데
카레 자체가 갖고 있는 풍미가 상당해서 재료를 많이 넣지 않아도 맛있지만
나는 건강을 생각해서, 그리고 더욱 풍부한 맛과 질감을 위해 여러 야채를 넣었었다.
가지, 토마토, 버섯, 양파, 양배추...
(카레에 들어가는 재료 치고 생소한가요? 넣어보세요. 정말 맛있답니다!)
이 모든 야채를 베이킹소다와 식초를 탄 물에 구석구석 꼼꼼히 씻고
손질해서 엄지손톱 크기로 자르고
나름의 순서를 정해 볶은 후, 충분히 끓여서
야채는 카레를 머금고, 카레에는 야채의 맛이 배어 나오게끔 했다.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 카레여왕이다.
맛도 좋은데 야채를 다양하게 많이 먹을 수 있어
건강도 챙길 수 있다.
게다가 카레에 들어있는 강황은 치매를 예방한다지?
퇴근하고 와서 후다닥 만들어 먹기 참 좋은 요리.
퇴근하고 온 남편이 식탁에 앉았다.
"뭐야~ 고기가 없잖아. 스팸 하나 구울까?"
밥을 살포시 덮은 카레 속 덩어리들을 찬찬히 관찰하더니
숟가락을 내려놓고 밥투정을 했다.
카레 색에 가려진 가지와 토마토는 발견을 못한 듯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남편이 가지와 토마토를 싫어한다는 걸 몰랐던 때였던 것 같다.
스팸?
"고기가 꼭 있어야 해? 없어도 충분히 맛있는데."
"그래도 고기를 먹어줘야지."
남편이 스팸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팸이 무슨 고기야? 정상적인 고기부위 다 팔고 남은 찌끄래기 갈아서 가공해서 햄으로 만든거 아니야? 그게 무슨 고기야. 게다가 짜기는 얼마나 짜. 건강에도 안 좋은 걸 굳이 지금 찾아서 먹겠다고? 이렇게 맛있는 카레가 있는데?"
실제로 스팸을 돼지고기 찌끄래기를 갈아서 만드는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요리가 스팸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생각나는 대로 스팸을 공격했다.
이렇게 하면 남편이 내 말에 수긍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스팸의 돼지고기 함유량이 92.4%야. 그 정도면 고기나 다름없지. 고기 먹자. 고기, 고기."
스팸의 돼지고기 함유량을 저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다니.
대체 왜 알고 있는 거지?
"그럼 뜨거운 물에 한번 데쳐서 먹어. 기름기랑 소금기 좀 빼고."
얼마나 먹고 싶으면 그럴까 싶어 내가 한 발 물러났다.
신이 나서 스팸 캔을 뜯고 편수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래서 남편을 큰 아들이라고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때 충격을 받았었다.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제대로 안 한 것처럼 느끼는 건가?
고기 아니어도 이 세상엔 맛있는 식재료가 얼마나 많은데.
고기는 적당히 먹어야지, 너무 많이 먹으면 좋을 게 없는데.
너무 육식주의자 아니야? 채소도 먹어야 하는데 가만 보니 채소를 거의 안 먹는 것 같네.
그러고 보니 연애할 때 남편이 했던 얘기가 생각이 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햄버거야."
햄버거라니.
대표적인 정크푸드 아닌가.
어릴 때, 뭣도 모를 때나 좋아하는 음식 아닌가?
다 큰 성인이 햄버거를 제일 좋아한다고?
그때도 좀 놀랐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는 날 보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어때서?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실제로 햄버거에 대해 남편과 '토론'을 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다.
"워런 버핏은 평생 햄버거랑 콜라만 먹었는데 지금 나이가 아흔이 넘었어. 아주 정정하다고."
그는 그고, 너는 너야.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이 나이에,
확실히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나도 나이를 먹나 봐~'라고 읊조리면서,
건강검진 결과표에는 해가 갈수록 빨간색이 늘어난다며 한숨을 쉬더니,
건강식을 먹으며 매일 러닝을 해도 모자란 이 시점에,
이젠 여드름 상처가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물지 않는다며 피부 재생력이 떨어졌네 어쩌네 한탄하면서,
운동도 안 하는 주제에,
햄버거?
이때부터 나는 왠지 모를 사명감을 갖고
남편이 모든 음식을 골고루 좋아하게끔,
특히 야채를 '억지로' 말고, '맛있게' 먹을 수 있게끔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요리할 때 일부러 채소를 신경 써서 넣으며
요리책도 사서 보고, 여러 레시피도 검색해 보았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한식파고, 남편은 굳이 따지자면 유럽파다.
나는 밥을 외치고, 남편은 빵을 외친다.
나는 국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고, 남편은 브런치를 먹자며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쥔다.
이런 남편이기에 나는 한식뿐 아니라 여러 국가의 레시피를 참고해서 요리를 시도해보곤 했다.
(이런 와이프 또 어디 있냐며 외쳐봅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4년이 넘은 지금,
다행히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지 남편의 식습관이 많이 개선되었다.
구운 토마토는 남편이 주말 아침식사로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로,
우리 집 냉장고에 토마토는 없으면 안 되는 식재료로 자리를 잡았다.
같이 마트를 가면 남편이 먼저 가지를 집어 든다.
가끔은 백종원 유튜브를 보고 가지 덮밥을 직접 만들어주기도 한다.
나물반찬은 딱 하루 이틀 먹을 분량만 만들었더니 남편도 잘 먹고,
(물론 만드는 사람은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놓아야 편한데 말이지요.)
돼지고기 김치찜을 만들되 간을 맵고 짜지 않게 했더니 '오~' 하며 김치를 열심히 집어먹는다.
"사실 난 편식을 하던 게 아니었어. 그동안 먹는 방법이 틀렸던 거야. 이렇게 하니 얼마나 맛있어."
내가 해준 요리가 맛있어서 그 싫어하던 음식들을 먹게 되었다니
어깨가 들썩들썩하고 기분이 좋긴 하다.
얼마 전에는 버섯과 부추와 당근을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는데
"흥. 야채 주제에 맛있군! 더 없어?"
라며 오물오물 먹던 남편을 보고 있자니 내심 뿌듯했다.
큰 아들의 입맛을 대폭 개선시킨 후, 나에게는 진짜 아들이 생겼다.
생후 130일을 향해 달려가는 내 아들.
아직 젖병에 담긴 우유만 먹고 있지만 이제 한두 달 후부터는 이유식을 시작할 예정이다.
내가 남편의 식습관을 반드시 개선시키고 싶었던 데에는
우리 아기를 위해서인 것도 있었다.
나는 우리 아기가 패스트푸드보다는 자연식을 좋아하기를 원하고,
고기와 야채를 골고루 잘 먹는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라는데,
아이의 입맛은 아무래도 집에서 가족이 먹는 음식대로 따라가게 되니까
남편의 협조가 필요했다.
(아, 물론 1차적으로는 남편의 건강이 걱정된 것이 맞다. 오해는 말기를!)
고맙게도 남편이 협조를 잘 해준 덕에
우리 아이는 편식하는 아빠를 보며 자라진 않을 것 같다.
요즘 나는 곧 새로운 음식을 맛보게 될 우리 아기를 위해
이유식 도구를 사고, 이유식 레시피를 찾아보며 바쁘게 지낸다.
부디 우리 아기가 엄마가 만들어 준 이유식을 골고루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라본다.
편식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