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복음은 왜 필요한가

The beginning 복음의 시작.

by 배재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마가복음 1장 1절 말씀)


마가복음은 로마 시대 때 마가가 집필했다. 그때 당시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은 황제가 즉위하거나 황제에게 아들이 태어났을 경우 쓰는 말이었다. 마가는 진정한 복음이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반역의 행위였다. 자신의 일생 전부와 목숨까지도 걸어야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복음은 어떠한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복음이 왜 필요한가?”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은 환영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니까. 포스트 모더니즘을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기에 끊임없이 진보해야 하며 스스로 답을 찾으며 발전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복음을 절대적인 진리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여러 가지 대안을 추구한다. 만약 복음이 B 그리고 C로 변해도 모두 옳다고 인정한다. 그 결과 사회는 복음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며 개인주의와 쾌락주의 그리고 다원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개인주의와 쾌락주의는 교보문고를 가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베스트 셀러 목록을 살펴보자.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미움받을 용기, 신경 끄기의 기술, 이제부터 민폐 좀 끼치며 살겠습니다. 쾌락 독서,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


한 번 사는 인생이니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풍조가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이를 쾌락주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진리를 복음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는 심각한 다원주의에 빠질 수 있다. 다원주의란 종교의 믿음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말한다. 다원주의에 빠지면 내 멋대로 신앙생활을 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크다.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들》의 몇 문장을 가져왔다.


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예수가 믿었던 신앙’으로 내 믿음이 바뀌었다. 예수는 종교적 압박과 정치적 고난에 싸여 있던 유대인에게 신이란 징계하고 벌주고 죽이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쳤다. 오히려 아버지와 같이 자애로운 사랑의 상징임을 알리기 위해 실제로 아버지로 불렀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장 큰 율법으로 모든 율법을 대체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가 신이 아니라 해도 그 행위에 대한 가치가 전혀 손상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를 대신해서 죽을 이유가 없다는 말과 같으며 성경에 나오는 복음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말이다. 과연 이 믿음이 신실한 믿음일까.



현재 사회에서 복음은 더는 기쁜 소식이 아닌 구전설화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도대체 왜 믿는 거냐?” 하지만 난 복음을 믿는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 예수님은 말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대신할 방법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A(복음)라는 절대적인 진리가 B로 변해버린 사건이 여러 번 나온다. B의 예시는 대표적으로 가톨릭의 부패가 대표적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복음을 되찾기 위해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대, 소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등을 집필했다. 이처럼 A에서 B로 변했다면 C라는 대안을 내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방법은 간단하다. 다시 A로 돌이키면 된다. 우리 여호와께 돌아가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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