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15세 소년 마이클은 갑작스러운 구토 증상으로 길거리 골목에 앉아 헉헉댔다. 그 모습을 본 36살 한나는 마이클을 집으로 데려가 정성스레 간호한다.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녀의 집에 찾아간 마이클은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육체적인 사랑을 나눈 후 함께 책을 읽게 된 두 사람. 그들은 책을 통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다. 한나는 늘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지만 자신이 책을 펼쳐 읽지는 않는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걸까.
나치 밑에서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사무직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는 그녀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마이클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한나는 이별에 대한 통보도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이 일로 마이클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어주지 못한다.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법원 견학을 갔다가 피의자가 된 한나를 본다.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을 봤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판사가 묻자 “난 그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일 뿐이야”라고 대답했다. 유대인을 가둬 둔 교회에 불이 났음에도 문을 열지 않은 행위를 “난 그저 죄수들의 탈출을 막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럴싸한 책임감만 있는 한나를 보며 “악은 무지로부터 나온다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문장이 생각났다. 마이클은 무지한 한나를 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녀의 감시원 동료들은 “한나가 유대인 감시 지침서를 만든 사람이다.”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운다. 자신이 문맹임을 밝혔다면 적은 형량을 받았을 텐데. 모든 책임을 떠안은 그녀는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무지한 한나를 일깨워주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문맹인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던 것일까. 마이클은 매일 한나에게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낸다. 그의 행동은 한나로 하여금 15살 마이클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법원에서의 수치를 기억한다는 메시지였다.
한나는 녹음테이프를 따라 읽으며 글을 배우고자 발버둥 친다. 아직도 한나가 “The...”라고 중얼대며 책의 The에 모조리 동그라미를 치는 모습이 생생하다.
20년 뒤 한나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채로 가석방된다. 둘은 20년 만에 재회한다. 하지만 마이클은 “아우슈비츠에서 일했을 때 기분은 어떤가?”라고 묻는다. 조금만 더 따듯했다면 좋았을 것을. 그의 냉랭한 태도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나치 밑에서 일한 한나의 선택은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다. 글을 모르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없다. 글을 배운 한나는 비로소 자신이 한 행동을 뉘우친다.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 7000마르크(약 400만 원)를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소녀에게 전달해달라는 유서를 마이클에게 남긴다. 그는 글자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는 그녀의 수감실을 살핀다. 그리고 그녀의 유서를 부여잡고 끅끅거렸다.
한나에게 글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15살의 마이클과 정신적인 교감을 나눴던 수단이자 자신의 무지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나가 글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마이클과 도란도란 책을 읽으며 같이 늙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