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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재윤 Jun 07. 2023

네가 그러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교사를 하다 겪게 되는 힘든 상황들

 3D 업종, 1990년대에 유래된 말로 다른 직종에 비해 어렵고 힘들어 구직자를 구하기 힘든 직업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3D는 Difficult(어려움), Dirty(더러움), Dangerous(위험)를 말한다. 이처럼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3D처럼 꺼리는 3대 기피 업무가 있다. 수업계, 고사계, 생활지도부이다. 수업계란 교사와 학급의 수업시간표를 학기마다 만들며 매일매일 시간표를 조정하는 일이다. 고사계는 학교에서 제일 중요한 시험을 주관하고 처리하는 업무이고 생활지도는 말 그대로 학생의 전반적인 생활 규정과 학교폭력 등등의 업무를 처리한다.


  내가 학교에서 맡은 업무는 3대 기피 중 하나인 수업계다. 수업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학기 시작 전에 시간표를 만들어서 전체 선생님들에게 공지하는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마무리되어야 하므로 방학 일주일 전엔 무조건 출근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이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출근하면 초과수당도 나오고 학기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 미리 출근하며 적응하기 수월했으니까. 


  학기 중 수업계가 주로 하는 일은 선생님들의 개인 사유로 인해 시간표가 변경될 때마다 시간표를 최신화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다른 근무지로 출장을 가거나 (연가, 병가, 조퇴 등등의) 개인 사유로 인해 생긴 수업의 공백을 타 선생님들에게 대신 들어가 달라는 협조 요청을 내가 담당한다. 이 일을 보강 처리라고 정의해보자.


   보강 처리는 단순히 생각하면 시간표 공백을 채우기만 하면 되므로 말처럼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생각해보라.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빈 시간에는 잠시 쉴 수도 있고 밀린 업무를 볼 수도 있는데 누군가의 수업을 대신 들어가라는 문자를 받으면 기분이 어떨지. 통상 보강 협조 메시지는 일과 전에 미리 확인하라고 미리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새 하루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런 문자를 받으면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을 거라.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간혹 가다 내게 종종 감정적으로 대하는 선생님들이 종종 계시다. 즉 수업계는 일과를 운영하는 업무가 힘들기보다 보강에 대신 들어가는 “사람을 달래고(?) 부탁하는 일”이 힘든 것이다.     


  보통 시간표가 바뀌는 일이 생긴다면 수업계 선생님에게 해당 사실을 일주일 전에 미리 알려주므로 일일 시간표를 바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의 앞날을 알 수 없듯이 종종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길 때가 더러 있다. 어느 날, A 선생님께 보강 협조 요청을 드렸는데 해당 3교시에 회의가 있어 어렵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 소식을 2교시에 들어서 급히 다음 교시에 보강에 들어갈 선생님을 찾아야 했다. 보통 하루에 보강 처리할 인원이 1~2명이면 해당 날짜에 수업이 제일 적은 선생님께 부탁하면 되므로 보강을 부탁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회의가 많은 날이면 부득이하게 수업이 많은 선생님께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전체 시간표를 살펴보니 B 선생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저런 사유를 설명하기엔 너무 구구절절한 것 같기도 하고 경우의 수는 오직 B 선생님 밖에 없었다.) B 선생님이 내 자리 근처에 계셔서 메신저를 드리기보다 직접 말로 정중히 부탁을 드렸다. 갑작스레 이런 부탁을 드려 죄송한데 혹시 보강에 들어가 줄 수 없냐고. 그러자 그 선생님은 내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선생님은 왜 보강 협조를 근처에 계신 선생님에게만 부탁하려고 하세요?” 난 갑작스럽게 생긴 일 처리가 귀찮고 빨리 처리하려고 근처에 계신 선생님에게 짬이나 때리는 사람으로 오해받았다. 너무 억울했다. 아니 내가 회의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출장을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정중히 부탁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난 그저 업무 협조 요청을 했을 뿐이다. 사람이 진짜 억울하면 화가 나기보다 정신이 멍해진다는데 순간 머리가 띵했다. 다행히 주변에 계신 선생님께서 학교 회의가 많이 잡혀 부득이하게 그런 상황이 생긴 거라고 상황 설명을 대신해주셔서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 일 처리도 못하는 교사로 낙인찍힐 뻔했다.


  보강에 들어가는 선생님에게 미안하다고 초코파이를 건네고 생각에 잠겼다. 직장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덕목은 서로가 하는 일에 대한 존중이 아니었을까. 무역회사로 예를 들자면 기획안을 내는 영업팀은 해당 분기별 예산을 확정하는 자원팀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것. 자원팀은 영업팀의 기획안이 실적을 낼 거라 굳게 믿고 밀어줘야 한다. 만약 상대팀이 제안하는 어려운 부탁을 계속 거절하기만 한다면 일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그래,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건 비단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라도 예외는 아니다. “아 연강이라 힘든데 선생님은 이렇게 밖에 처리를 못하시나요?, 아 이날은 힘든데.. 차라리 다른 날로 해주시면 안 되나요?”라는 말에 깊이 박힌 감정은 상대에 대한 불신이다. 회사 지침이라 어쩔 수 없다는 상담원에게 “왜 회사가 일처리를 그렇게밖에 못 하냐고 아무리 욕을 하고 떼를 쓴다고 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담원도 그저 회사의 지침을 알려주는 전달자에 불과하니까.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에게 감정적으로만 대하는 사람을 보며 늘 생각한다. 난 저런 그지 ‘인간’이 되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자고. 




  오늘 하루,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펼쳐진다면 상대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말하는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떤가.



개구리 선생님의 슬기로운 교직생활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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