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18살의 나는 거의 <각시탈>, <아이캔스피크> 등 항일 투사급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민간 외교관인 ‘반크’ 같기도 했다.그때 누가 일장기를 줬다면 바로 찢었을 것이다. (지금도 좀 그렇지만) 이 신념은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됐다. 2000년 즈음 태조 왕건, 허준, 대장금, 여인천하 등 사극이 유행했다. 그 드라마들을 보며 조상들과 나를 동일시했고, 경복궁에 놀러가면 전생에 왕족이었던 것처럼 심장이 뛰고 아련해졌다. 공주병 아니었나 싶겠지만 궁녀나 신하여도 상관없었다. 조선시대 때 살았었다는 게 중요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런 날 보고 비웃었다.
얼마큼 진심이었는지, 초등학생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었다. 그것도 만화로 된 것이 아닌 두껍고 글씨가 작은 책. 고종, 순종 대로 가면서는 절로 숙연해졌다. 일제 강점기의 피해자들은 파렴치한 일본의 행위-생체 실험, 10대 소녀들에게 사람 고기를 먹이고 고문하다 죽이고 위안부를 시키는 등- 를 증언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아시아에 지은 업보가 많은데 일본은 사과하지 않는다. 6.25 전쟁으로 한국이 가난해질 때 그들은 경제 특수를 누리며 웃었다. 지금도 이미지 메이킹을 하며 혐한과 역사 왜곡을 한다.
내가 답답한 부분은 이런 것들이다. 왜 사람들은 화내야 할 곳엔 화를 안 내고 화 안 내도 될 곳에 쓸데없이 화를 내지? 일본이 한국에 해를 끼치는 건 현재진행형이고 고대부터 우리의 주적인데 왜 과거라며 묻자고 하지? 피해자들이 살아있는데 무슨 권리로 용서를 하지? 거의 모든 피지배 국가는 지배 국가를 싫어하는데, 왜 한국인들은 일본에 우호적이지? 정치인들은 왜 일본에 저자세로 숙이지? 의문투성이였지만 난 용기도 없고 힘도 미약한 미성년자일 뿐이었다.
그런 열혈 항일 주의자이던 내가 미국에 날아갔다. 18살에 10개월 동안 살게 된 거다. 보통 외국에 오면 애국자가 되거나 아예 조국을 잊고 살거나 둘 중 하나라고들 한다. 난 원래도 애국자여서 ‘애국자 심화 버전’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다닌 공립 학교엔 한국인이 없었다. 종종 인종차별도 당했기 때문에 더 한국이 그립기도 했다. 운명인지 뭔지, 심형래의 영화 <디워>가 개봉한 시기였다. 가족들과 미국 극장에서 그 관의 유일한 아시안으로서, 엔딩의 아리랑을 따라 부르며 눈물을 글썽였더랬다. (그 영화는 솔직히 엔딩 OST가 다했다.)
더욱 불을 지핀 건 세계사 시간이었다. 세계사 교과서 앞부분엔 세계 지도가 크게 있었는데, 동해가 아니라 Sea of Japan 으로 돼있었다. 아시아에 대해 배울 때면 일본, 중국만 다루고 한국은 언급도 안 했다. 이런 현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정말 작고 영향력이 없는 나라에서 왔구나. 2007년이었다. 강남스타일, BTS가 위상을 높이던 때도 아니었고 대부분 한국이라는 나라가 뭔지도 몰랐다. 미국인들은 노스코리아? 사우스? 이 정도의 농담만 해댔다.
18살의 나는 오기 어린 결심을 했다. 한국에 대한 정보를 담아 알리고 싶었다. 변방의 작은 나라인 한국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며칠간 새벽 3시까지 영작을 했다. 인터넷에 마땅한 소개 글이 없어서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한국 문화와 독도, 일본과의 관계 등에 대한 설명을 가독성 좋게 편집했다. 글 문서를 예쁜 사진들과 함께 인쇄해서 소책자를 만들어 CD 케이스에 꽂았다. CD에는 한국의 음악들을 담았다. 다행히 내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녹음한 건 아니다.
10개 정도의 책자를 프린트해 호치케스를 박아 제본했다. 열심히 완성해 놓고 막상 주려니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걸 줘도 되나, 관심 있게 읽어줄까…? 소심하게 쭈뼛거리며 Global History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책자를 받아 든 세계사 선생은 나이스한 웃음을 지으며 책자를 슬쩍 넘겨봤다. “How nice of you. Great job! 정말 잘했다, 멋지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그것으로 모든 걸 보상받은 것 같았다. 용기를 얻고는 다른 선생님들과 외국인 친구들 몇 명에게도 나눠주었다.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이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지만 최대한 아무 것도 아닌척 건넸다.
“어... Korea에 대한 건데 심심할 때 읽어봐!“
그들이 나중에 한국을 보며 그 책자를 1초라도 떠올렸길 바란다. 받고 버렸을 것 같지만...
외국인 학생들을 담당하던 선생님은 말해주었다.
“일본과 한국 관계를 조금은 알고 있어. 네가 화내는 것도 당연해.”
“오 맞아요. 정말 억울한 일이 많았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걸 알면 좋겠네.”
“네. 한국은 자국 홍보를 적극적으로 안 하는 편이라서요.”
“MJ, 네가 그 역할을 하고 있네.”
나는 쑥스럽게 웃었다.
30대 중반이 된 나는 그리 열정적으로 애국하진 않는다. 그때 애국의 기운을 다 쓴 듯하다. 물론 여전히 일본으론 여행도 안 간다. 26개국을 여행갔음에도. 그렇다고 일본에 가는 사람들을 비난하진 않는다. 나 같은 사람들도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미래에 ‘반크’ 같은 온라인 외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진로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 지금은 광고 카피를 쓰고 글을 끄적이고 있다.
책자는 안 만들지만 글을 쓰는 김에 바라는 게 있다면, 개개인들이 한국의 좋은 점들을 알리진 않더라도 훼손하진 않으면 좋겠다. 자국을 까는 게 ‘쿨하다’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혀 한국의 단점을 나서서 홍보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 한국 말고는 아무도 인터넷, 유튜브 등에서 자국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런 평판이 모여 국격을 낮추고, 해외에 나간 자국민의 발판을 훼손한다는 걸 아니까. 초국가 시대에도 우리는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될 수 있다. 자기를 낮추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광복절 같은 날, 1년에 몇 번이라도 독립운동가들의 항일 정신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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