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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an 17. 2021

피노키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케케묵은 상자에서 꺼내 바닥에 펼쳐놓은 네댓 개의 다이어리들. 분명히 내 기억 속 이때의 나는 주로 우울했다. 우울하다 뿐이냐, 혼돈이 진득거리는 구덩이 속에 발이 빠져 있었는데… 다이어리가… 다이어리가 이토록 빛날 수 있는가. 아, 낯설다. 감히 열어보고 싶지가 않다. 시간이 흘러 이것들이 흑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라면 좋았을 걸, 오히려 그 반대다. 이것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닌 화려함을 뒤집어쓰고 있다. ‘행복’이라든지 ‘멋-진!’이라든지, 이 안에 난무하는 들뜬 단어들 전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한 번 덮어 새것으로 뒤집어씌운 것. 내가 썼으나 내 것은 아닌 이-상한 다이어리.

 

  성적이 한 방에 평균 30점이 떨어졌는데 '괜찮아~! 바닥을 찍어봐야~' 같은 말을 또박또박하게도 써 놓았다. 비밀 연애가 버거워 마음에 주눅이 들고, “걔가 널 좋아하는 게 맞느냐”고 의심받는 연애를 하면서도 꿋꿋하게 핑크빛 환상에 스스로를 유배했다. 오래도 갇혀 있었다. 그때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구구절절한 분석의 문장만이 머쓱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그러다, 전남편이 사다 준 초콜릿에 감동했다는 둥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제정신이었는가’ 믿을 수 없어진다. 내가 이토록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이리도 손쉬운 용서라니! 고장 난 기계처럼 퉁퉁대며 폭언으로 신혼집을 도배하던 자는 이렇게나 쉽게 용서받았다. 넘어가는 갈피 갈피마다 다짐과 소망, 기도, 용서, 긍정, 무한한 이해, 사랑, 의미, 숨겨진 의미, 의미의 부여, 의미의 부여, 의미의 부여가 꽉 차 흘러넘친다. 넘친 것들은 이미 상했다. 부풀리고 뻥 튀긴 행복과 우는 얼굴마다 덧칠한 가면에 금세 눈이 빙빙 돈다. 


  섣부른 위로가 슬픔을 쫓아내고, 말뿐인 희망으로 포장한 일상은 속이 푸석푸석하다. 내게 다정하지 않은 이들을 이해하겠노라고 벌인 나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도 나고 진 것도 나다. 그때마다 나의 일부가 삶에서 추방당했다. 뒤돌아 웃는 내 얼굴은 번지르르했지만, 코가 점점 더 길게 자라났다. 이게 왜 이러지, 불안했던 그 마음만이 모여 나를 살렸나니. 나는 무엇이 두려워 이토록 스스로를 기만했나. 차라리 때마다 “아이고,망했다”며 울었으면, “숨는 거 재미없다”고 짜증을 냈으면,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그것도 변명이냐?”고 누군가의 뚝배기를 쳐보았다면, 상세한 폭력일지를 써서 증거자료를 차곡차곡 쌓아 소송이나 걸었다면 그게 더 나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게 더 낫다. 나의 드넓은 이해심 아래 숨 쉬었던 자들아, 값없이 용서받았던 자들아, 시절이 좋았던 줄 알라. 


  이 이상한 다이어리 속에서 살아남은 말들을 오려 모은다. 포장되지 않은 말, 큰 지면을 차지하지 못하고 구석에 숨죽여 있는 말, 해석이나 의미부여 없이 벌거벗은 말, 공격에 취약하고 목소리가 작은 말. 몇 없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형광의 말들은 그때의 내가 얼마나 그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만 떠오르게 한다. 이내 쳐다보기도 싫어지는 이 마음이 그 시절의 힘듦이 떠올라서인지, 그 힘듦을 그토록 외면만 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서인지 헷갈린다. 얘, 피노키오야, 코가 너무 길어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면 울면서라도 진실을 말해. 그 우스꽝스러운 가짜 코를 부러뜨려. 그럼 넌 지금 거길 떠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코피가 대수니. 


  그래, 그럴 때가 있지. 진실이 뭐야, 진심이 뭐야. 정말 나조차도 모르는 때가 있지. 그러나 명백한 것은 기록이 정직하지 않으니 쓸모가 없다. 나는 기억 속의 나만 남겨두고 부러진 가짜 코를 모아 처분하기로 한다. 이것이 나의 새해 첫 미니멀리즘. 







*사진 출처 Unsplash, Vlad Hilit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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