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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an 24. 2021

사치스러운 겨울


  얘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사과 세 조각과 딸기 세 개. 한입 촤아 베어 물면 둘 중 어느 쪽이라 할 것 없이 즙이 챠르릅 흐른다. 달기는 또 어찌나 단지 '당도가 높다'는 말로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건... 이건... 설탕 주사 맞았니, 니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사랑한단 뜻이야, 과일들아!!
 


  빠듯한 살림에 과일이 아주 자주 사치품이 된다. 일단 가장 필요한 것들 위주로 장바구니를 채우다 보면 안 먹어도 안 죽는 음식이 뒤로 밀리는 것이다. 우리 집은 과일이나 쥬-스나 쥐포류가 냉장고에 있으면 "이 집 요즘 살림 좀 폈나 보오~?"하는 건데, 일 년에 몇 안 된다. 가끔 '야아! 내가 이것도 못 사면!' 하는 맘으로 오천 원 짜리 딸기 한 팩 또는 자두 한 팩, 아니면 금귤 한 팩을 과감하게 사 와도 줄어드는 건 순식간. 그래서 대부분의 날에 나는 하우스메이트와 마주 앉아 지난 이틀간의 사치를 생각하며 "아~ 행복했지, 그때." 하는 날을 보낸다. 재밌는 건, 같은 집에서 같이 자랐어도 '사치의 음식' 품목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독립해서 자기만의 살림을 꾸리게 된 동생은 처음 생긴 자기만의 냉장고에 탄산음료를 열 맞춰 진열했다. 보기만 해도 이가 썩는 광경에 "얘가 왜 이래~?"했는데, 동생이 말하길, 자기는 시원한 사이다가 가득 든 냉장고를 꿈꿔왔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동생의 얼굴이 빛났다. 아, 성공한 녀석. 성공했구나, 너. 사실 나는 그 애가 물이나 좀 많이 마시고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네가 사이다라면 나는, 나는... 수박이다. 여름엔 수박, 겨울엔 딸기, 철철이 곶감. 수박과 딸기와 곶감이다. 없어도 살지만 있으면 입이 아주 즐겁고, 혓바닥이 춤추며 하루에 몇 번씩 호로로로로 노래할 기쁨의 원천. 


  사과 좀 먹어 봐.
딸기 보냈어, 맛있게 먹어~
군것질거리 안 필요해?
이런 말들,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에서 벌써 과즙이 흐르고 설탕 가루가 떨어진다. 그러나 들어본 중 가장 새콤한 말을 고르자면 단연 "언니~ 애들은 맛있는 걸 먹어야 돼~!"다. 우리 막내 이모의 말.
 


  워낙에 간식이나 군것질거리를 찾지 않는 우리 엄마는 슈퍼집 사장님이 "자기, 애들 과자 좀 사 먹여~"하는 소릴 듣고서야 '애들, 과자를 사 줘야 하는 거야?'했다고 한다. 그랬던 우리 집에 막내 이모가 케이크와 함께 온 것이다. 그날 나와 동생이 그 앞에서 어떤 얼굴을 했었을까 궁금해진다. 엄마는 지금까지도 케이크를 먹을 때마다 포크를 들고 이모가 했던 말을 따라 한다. 그러면 나는 한 번도 빠짐없이 감탄한다. 어린이가 있는 집엔 꼭 적어 놓아야 할 명언. 애들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응용하자면, 사람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행복하게시리. 행복해지도록~! 하얗고 보드라운 고소한 크림에 딸기는 몇 개나 올라가 있었을까? 아니, 초코케이크였으려나? 당시 젊은 사람 중의 젊은 사람이었던 막내 이모의 센스에, 사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 날이 내 인생에 이리도 달콤하다. 


  그래서 이번 겨울, 우리 집에 사과 한 박스를 보내 준 고모와 그게 끝나갈 무렵 또 다른 꿀사과 한 박스를 보내준 고개 너머 옛 동료, 우리 집의 사치 품목이 무엇인 줄 익히 알고 큰 딸기 팩을 네 개나 보내준 동생과 우울하다는 내게 온갖 과자를 담은 박스를 보내준 친구. 덩달아, 가끔이라도 슈퍼에서 과일 팩을 덥석 집어들 수 있게 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 때 되면 "얘, 쌀 가져가라"하는 - 그 마음이 눈물 나게 고마워지는 것이다. 당연한 건 당연해서 어렵고, 특별한 건 특별해서 어려운 게 삶인데 그 당연한 것도, 특별한 것도 모두 선물로 받았다. 과일 한 팩 쉽게 집어 들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조금이나마 더 나은 것을 꿈꿀 수 있었다면 전부 받은 것들 덕일 테다. 문득 내 어린 시절, 여름마다 지치도록 먹었던 수박과 그 수박으로 만든 수영장, 그 수영장을 헤엄치는 씨앗들과 거기에 따라온 행복은 아빠의 하루를 몇 동강 내 바꾼 것이었을까 가만히 셈해본다. 


  수박은 비싸다. 딸기는 귀하지. 사과는 알알이 고와 깎을 때마다 살이 깎이지는 않았나 아깝기 그지없고, 케이크는 언제나 특별하지. 곶감은 숨겨 놓고 먹어야 하고, 쌀은 어디서 솟아나는 게 아니야. 먹고 싶은 과자를 다 먹으면 카드값이 금방 일억이 돼, 그치. 사치스럽다. 사치스러워. 그러니까 이 사치스러운 것들은... 전부 사랑이구나. 사랑이었구나.

나는 사랑을 먹는구나. 나는 사랑을 먹었구나.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 거구나.

나도 누군가에게 철마다 철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사치스러운 것을 선물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진출처 Unsplash, Roksolana-zasiad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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