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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Feb 21. 2021

스노우 사파이어와 시

 

 책상 위에 화분을 올리는 마음이, 뭐랄까, 마치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기가 있어 그 아기를 들어 안은 양 막막했다. 인터넷에 '스노우 사파이어'를 검색해 키우는 법을 메모하고, 화분에 붙였다. 이름이 도통 외워지지 않아 이름까지 써 붙였다. 스노우- 사파이어. 그게 벌써 3년이 넘은 일이다. 우리 집에서 식물을 담당하던 유일한 사람이 영영 떠난 참이었다. 나는 물조리개를 들 때마다 "이제 아무도 죽지 말자"며 물을 줬다. 이제 아무도 죽지 말자. 당분간은 우리 중 누구도 죽지 말자.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스노우 사파이어는 죽지 않고 살아줬다. 3년이나. 


  식물 같은 건 계획한 적이 없었다. 마음에 들여 본 적도 없었다. 우리 집의 식물담당은 쭉 아빠였고, 나는 "이것 봐~"하면 가서 구경만 하면 되는 편한 입장이었다. 작은 집으로 이사하면서는 아빠가 키우던 그 많은 식물들이 어디 갔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아주 오랫동안은 우리 집에 식물들이 없어졌다는 것도 몰랐다. 그랬으니 3년 전 큰고모의 꽃집 개업 행사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집에 식물이 살았던 것은 먼 옛날의 전설이 되어 "아빠가 있을 땐 화분이 많았지"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집 안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허전했겠지, 창을 열면 남의 집이 보이는 서울의 한복판에 살면서 어쩐지 숨 막히는 답답함이 왜인 줄도 모르고 헉헉댔겠지. 


  이제 보니 식물은 비어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나이가 들면 식물이 좋아진다는 말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채우기 위해 애쓰지만 어딘지 비어가는 삶을 사노라면 조금씩 비는 공간마다 비로소 식물이 들어와 산다. 아무 소리도 없이.... 내 마음엔 조용히 숨만 쉬는 빈 공간이 한 뼘도 없었건만, 아빠가 사라진 이후 아주 자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음이 되어 바닥에 누웠고 그때마다 스노우 사파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누운 채로 잎사귀를 구경했다.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햇빛이 잎사귀가 머금은 물을 비추어 형언할 수 없는 반짝거림을 만든다. 아, 그래서 사파이어인가 보다, 희한한 조합이라고 생각한 이름이 왜인지 알게 됐다. 위에서 보면 눈이 온 것 같고, 아래에서 보면 보석이 박힌 듯 반짝거린다. 스노우- 사파이어. 이걸 알고 나선 바닥에 널브러질 때마다 몸을 굴려 잎사귀 밑에 얼굴을 댔다.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터지면 숨이 쉬어졌다. 세상엔 그냥 막 웃음이 터질 만큼 예쁜 것도 있구나. 그걸 누워서 발견했다는 게 기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바닥에 쓰러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구나 싶었다. 


  스노우 사파이어는 저렇게 가만히, 고요하게 서서 뭘 하고 있나. 아마 시를 쓰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부는 바람 사이에 홀로 서 있는 것. 여리고 부드러운 새잎이 돌돌 말린 몸을 돌려 춤추듯 허공을 휘감아 피어날 때, 스노우 사파이어는 온 존재로 시를 쓰는 중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새잎이었을 오래된 잎들이 가장자리로 자리를 내 줄 때마다, 오래 보고 있어도 결코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리고 고요한 움직임으로 사실은 시를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매일매일 끊임없이.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살고 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게 존재의 이유라는 듯이. 


  그러나 나는 시인이 아니다. 아빠는 그랬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워 혼자 떠난 여행에서 어떤 시를 읽으며 생각했었다.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구나.' 내 마음에는 사막의 바람이 불었었고, 그런 바람 속에서는 거친 모래와 흙이 씹혀 말을 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모래를 침과 함께 뱉어가며 말을 쏟았지. 나는 시는 잘 모른다. 부는 바람이 야속해서 죽어도 혼자 있지 않으려 소리를 질러댔으므로 그 바람 소리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어보지 못했다. 그냥 나는 지금에서야, 단칸방을 벗어나자마자 베란다와 옥상 가득 식물을 들였던 아빠를 떠올리고, 아직도 시를 쓰며 꽃집을 하는 큰고모와 우리 집에 와 있던 며칠 동안 시집을 읽던 막내 고모, 그 막내 고모가 제일 먼저 아빠 무덤가에 국화를 심었던 것을 떠올리며 식물과 시인들이 왜 서로를 마음에 들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사를 간다. 이사를 가면 아빠는 살아 돌아온들 새집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빠와의 마지막 집인 이곳에서 스노우 사파이어도 생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 '그때 분갈이를 하지 말걸' 후회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생사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울렁거리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는 건, 가만히 생각해보니 사실은 내가 저를 돌본 게 아니라 저가 나를 쭉 지켜보고 아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굳이 지금, 이제 와서 노랗게 시들어가는 게 이제는 누가 죽어도 그런 거 무서워하지 말고 살라고 하는 것 같아서다. 새집으로 함께 가주지 않는 스노우 사파이어에게 주제넘게 서운한 마음이 든다. 나는 그가 쓰는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시를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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