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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Feb 27. 2021

어차피 미래는 보인 적이 없었지


  은행원과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벽 아래 조그맣게 뚫린 공간으로 내 경제 사정을 와르르 쏟아 넣었다. 쥐구멍 같네, 그런데 이제 숨을 수는 없는. 아,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이사는 3월... 아, 무소득자고요, 대신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뽑아왔습니다. 네네, 그것도 가져왔습니다. 내 얼굴이나 표정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그건 억지로 쥐구멍 안에 들이밀 수도 없다. 유리 벽에 부딪혀 흘러내린 몇 가지 말들과 숫자로 된 나만 구멍 사이로 속속 들어간다. 주민등록 번호, 핸드폰 번호, 카드로 긁은 금액, 필요한 돈의 액수 - 모아봐야 형편없는, 숫자로 된 나의 일부. 역시 문과인 건가.

 

  멍-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지만 짬을 내어 멍하니 유리 벽 안쪽을 들여다봤다. 만약에 내가 '클라이언트'들을 만날 때, 이런 투명한 창 뒤에 앉아 쥐구멍 혹은 새끼손가락으로 콕콕 찔러 만든 듯한 몇 개의 구멍을 쳐다보고 있었더라면... 그러니까 내게 누군가의 눈이나 얼굴 같은 것은 쉽게 잊어도 되는 책상이 주어졌었다면 조금 더 오래 일할 수 있었을까.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좋겠네, 이런 유리 벽. 이런 막이 있어서.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안다. 어떤 말들은 벽이 없는데도 누군가에게 닿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리니까. 그걸 어떻게든 말하고 또 말해내는 사람들의 말 앞에는 벽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내가 내민 서류와 수없이 서명한 신청서들이 춤추듯 펄럭거린다. 펄럭. 펄럭펄럭. 짝을 찾고 순서를 찾아 제자리에 놓인다. 손때가 잔뜩 묻은 키보드가 달그락대면 모니터에 뭔가가 적히고, 또 다른 서류가 쥐구멍 사이로 스윽 나온다. 그러면 나는 또 서명을 하고 그는 복사를 하고 다시 또 서류들은 춤을 추고.... 나는 문득 그 유리 벽 안쪽의 세상이 마음에 든다. 매력적이네, 은행원들의 세상. 쥐구멍 사이로 안쪽의 안정감이 찰박찰박 흘러나오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한다. 내 뒤엔 아늑하지 않은 로비가 있고, 그 로비의 큰 문은 수시로 열리고 닫힌다. 번호표 뽑히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와 나를 밀어내는 듯하고, 유난히 추운 날의 냉기가 목 뒤로 훅 끼쳐올 때마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내 평생 은행이 매력적이었던 날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은행과 그 안의 분위기와 은행원들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빤히 직업이 있는 내게 그건 직업도 아니라는 듯 "너 이제라도 은행에 취직해라" 권하는 사람들이 싫었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비영리 말고 영리를 다녀야 한다", "아직 안 늦었는데 공무원 준비나 하지, 왜" 같은 말 - 돈 되지 않는 것은 없는 셈 치는 얄팍한 가르침, 그 맨 앞줄에 은행이 있었다. 내가 쭉 반발하며 살아온 것. 그런데 오늘은 그냥, 참 매력적이다. 네모난 유리 벽 안. 등 뒤가 따뜻한 그곳. 뒤돌아보지 않아도 한눈에 로비가 보이는 자리. 쥐구멍 사이로 선별된 것들만 들어 오는 안전한 곳. 네모낳게 네모낳게 각 맞춰 살아질 것 같은 그런 느낌. 거기서라면, 미래도 보일 것 같아. 


  그러나 나는 대책 없게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한다. 거기엔 언제나 내 미래도 포함되어있다. 한 번도 보인 적 없으면서 매 순간 내 앞에 당도해 있는 미래. 나는 이제 하루 여덟 시간을 돈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 하루 여덟 시간, 견디기엔 너무 길다. 실업급여는 끝이 났지만, 재취업도 구직도 회사도 싫다. 누군가의 인정 같은 것도 바라지 않은 지 오래되어 그들도 내가 그들의 기대에 미칠 것이라는 기대를 버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꽤 힘들었고 결국 해낸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려 해낸 일을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오늘도 내가 어떻게 해야 나일 수 있을지만이 궁금하다. 어떻게 해야 충만하게 나일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당장 내일 죽어도 죽은 게 다른 누가 아닌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바라는 기승전결 따위 없는 무자비한 인생에서 지금이 내 인생의 결結에 다다른 순간이라면 나는 뭘 하고 있는 게 좋을까, 그것만 생각한다.


  어차피 미래는 보인 적이 없었지. 그러니 보이지 않아도 놀랄 것 없지. 보이지도 않는 길 앞에 서서 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한 레퍼런스가 되어주기로 한다. 그러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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