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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May 29. 2021

치자나무와 봄

 

  다가오는 유월에는 꽃이 핀다. 우리 집 치자나무가 꽃을 피우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너무나 단호하고 강단 있어서 드셌던 지난겨울의 누구도 말릴 수 없다. 나도 치자를 말리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그저 경이로워하며 바라보고 있다. 벌레가 붙진 않았나 잎사귀를 살피다 발견한 첫 꽃봉오리는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했는데, 일부러 숨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그 귀한 것을 다시 잎사귀들 사이에 숨겨두었다. 올해 첫 치자꽃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핀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부터 꽃이 핀다... 나는 치자를 너무 사랑해 비가 오는 날에라도 물 묻은 잎사귀까지 한 아름에 끌어안을 수 있다. 


  치자에게 지난 3년은 숨만 쉰다 해도 할 만큼 한 시간이었다. 생존만으로도 벅찼던 날들. 꽃이 피지 않아 조바심이 났던 내가 꽃을 피우게 해준다는 영양제도 꽂아 보고, 방바닥에 생기는 볕뉘를 따라다니며 화분을 옮기고, 비 내리는 창밖으로 화분을 내밀고 서 있어도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치자는 봄마다 꽃받침을 조금 만들다 마는 것을 반복했다. 꽃향기가 너무나 그리운 해엔 손바닥만 한 화분을 하나 더 들이기도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우리 집에 온 치자들은 전부 데려온 첫해에만 꽃을 피웠다. 그러니, 이사 후 두 달 만에 기다렸다는 듯 꽃을 준비하는 치자를 보고 있자면 미안함과 벅찬 마음이 동시에 들어 눈물이 핑 돈다. 그동안의 환경이 너에게 얼마나 박했던 거야! 차라리 꽃 피우지 않고 제 몸만 돌본 3년을 "잘했다"고, 화분 밑동을 몇 번이고 도닥여 본다.  


  지난 3월의 이사로 치자에게는 바깥이 생기고 나에겐 안이 생겼다. 마당은 아니지만 햇빛도 비도 바람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베란다는 치자의 몫, 바깥이 있기에 안도 있는 실내는 나의 몫이다. 우리 둘 다 숨이 트였다. 나는 뒤늦게서야 서울의 좁은 빌라가 치자를 치자대로, 나를 나대로 상하게 했다는 생각을 한다. 막연히 답답하고 갑갑했던 시간이 사실은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롯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화되는 데는 크게 일조했을 거라고. 창을 열면 남의 집 거실과 눈이 마주치는 곳, 내 집안 또한 훤히 드러낼 각오를 해야 하는 곳, 그럴 용기가 없으면 밀폐된 실내가 되는데, 이웃한 벽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를 듣자면 또 온전히 안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 바깥도 안도 아닌 이상한 공간에 살면서 치자는 알았을까? 왜 꽃을 피울 수 없는지. 그렇지만 이유를 알았다 한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집 아닌 공간에 들어가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본 어떤 집은 싱크대 앞에 변기가 있었다. 뉴스에서 본 어떤 집은 비닐로 지어졌고 화장실이 없었다.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눈이 오면 얼어붙는데 어떤 집 주인들은 이런 것도 집이라고 만들어 놓고 몇십만 원씩 받는다고 했다. 몇십만 원을 준다 해도 살고 싶지 않은 집에 임차인들을 집어넣고 돈을 받는다고 했다. 아, 세상이 어떻게 더 좋아질 수 있을까. 그동안 내가 세상에 기대하고 부려왔던 욕심이 우스워진다. 나는 요 며칠 밤마다 침대에 누워 헛웃음을 터뜨렸다. 윗집의 변기 속으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옆집의 TV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천장을 타고 누군가의 방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웃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집이 아니었구나, 집은 그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거구나. 웃는 입안이 썼다. 

 

 치자에게는 말을 아끼려고 한다. 힘들었던 지난 3년이 있었기에 올해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는 거라는 쉬운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몇 번이고 꽃을 피우려 애썼으나 꽃받침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바로 지금을 위한 거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강하고 힘 있는 너를 꽃받침조차 만들기 힘든 공간에 두어서 미안하다고만 해야지. 정말 미안해. 네가 힘든 줄도 몰랐는데, 힘든 줄도 몰랐던 것까지 미안해. 내가 치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거기까지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이 무색하게, 이렇게 치자를 감싸고 도는 것이 민망할 만큼 치자는 기운차고 강하다. 그저 생존만 해야 했던 긴 시간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 꽃을 준비한다. 매일 조금씩 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든다. 


  봄은 봄이 아닌 것들을 청산하며 온다고 했다.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새잎들이 사실은 겨울에 맞서서 얼어붙었던 모든 것을 청산하며 피어나는 것이라고. 꽃은 연약하지 않다. 내 치자나무도 그렇다. 봄을 열어젖힌 치자는 멈추지 않는 기세로 하얀 꽃을 피워낼 것이다. 나는 비로소 안에 들어와서 창밖에 있는 치자를 본다. 치자는 바깥에, 나는 안에. 유월엔 하얀 치자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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