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슬 Jun 14. 2021

바닥은 아몬드


  우리 집 바닥은 아몬드야. 아몬드로 골랐어.
  이 말을 하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어머, 뭐야. 왜 이래. 주책이야. 누가 들으면 웃겠어. 그렇지만 마루가, 장판도 아닌 마루가 아몬드 색인데 어떻게 안 울 수 있나. 게다가 그걸 내가 고른 건데! 진작 좀 골라볼걸. 골라도 되고 고를 수 있다는 걸 어쩜 이렇게 까맣게 몰랐을까. 친구들은 내 떨리는 목소리 같은 것을 조금도 의아해하지 않고, 신나게 손뼉을 쳐 줬다.
  야아~잘했다, 잘했어!
이런 일로 축하받는 삶을 산다니. 나는 그 손뼉에 또 감격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으아아 우는 소릴 냈다. 손뼉 세례가 조금만 더 길었거나 식당 안에 다른 손님들이 없었더라면 정말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 이토록 생소한 대화라니. 집에 어떤 마루를 깔았는지에 대해 논하다니. 나도 다 컸구나. 누가 얼핏 들으면 부잣집 사모님들의 대화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잘 들어보면 들쥐 세 마리의 대화에 가깝다는 걸 금방 알아채겠지. 서로의 캄캄한 세월을 아는 들쥐들.
  얘들아, 바닥을 아몬드로 골랐지 뭐니!
들쥐 하나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눌러 닦는다. 꾹. 꾹. 다른 들쥐들이 손뼉을 치며 자기 일처럼 축하해 준다.
  잘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견과류로 만든 파이를 구워 파티를 열자!

 
  집은 어떻게 해야 보금자리가 되는 걸까. 여태 내가 거쳐온 집들은 정말 내 보금자리였을까. 처음 마루 색을 고른 이 집이야말로 내 보금자리가 될까. 아닌가, 직업이 없어 보금자리론을 받지 못했으니 애초에 글러 먹은 일인가. 도대체 어째서 나에게 집이란 것은 밖으로 튀어 나가기 위한 거점일 뿐이었는지 곰곰 생각해본다. 머물러 가꾸기보단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머무는 임시의 거점. 영원한 집이란 게 평생 없을 것이 불 보듯 뻔한데도 마치 정말로 갈 곳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굴었다. 곧 있으면 청약이라도 될 것처럼. 돈이라도 생길 것처럼. 누가 집이라도 줄 것처럼. 이러니 사람들이 자꾸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너희 집으로 돌아가' 같은 잔인하고 서글픈 말을 돌림노래마냥 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정말로 갈 곳이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바보 같은 인생들이.

  그러나 눈 씻고 찾아봐도 여태껏 내가 내 힘으로 산 '큰 것'이라고는 600에 1800짜리 책상이 전부이고, 누가 지금 나에게 "네 자리로 가!"라고 하면 갈 수 있는 곳도 책상 위뿐이다. 딸린 서랍 세 개를 열어봐야 허공에 떠 있을 뿐인, 갖다 놓을 땅이 없으면 소용도 없는 내 보금자리. 나는 그걸 들고 여기저기 다녔다. 아무리 다녀봐야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집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저게 딱 내 관 사이즈겠구나' 싶은 날들도 있었다. 아, 처음부터 전부 내 것이라고 우길 것을 그랬나. 내 집 아니어도 내 집인 양, 내 것 아니어도 내 것인 양 생각하고 사는 편이 정신건강이라는 측면에서도 더 나았을 텐데. 월세 집이어도, 전셋집이어도, 시어머니가 왕이던 그 집에서도 그래 볼 걸 그랬지.
  제가 사는 집이거든요!
더 큰소리로,

  제가 사는 집-이-거-든-요! 저도 고를 수 있-거든요!
 

  독립은 포기한다. 이제라도 재빨리 할 수 있는 한 집을 가꾸기로 한다. 선택은 많은 경우 사치지만 그 사치를 있는 한껏 부려야겠다. 너무 오래 선택지 없이 살면, 집주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살이 오르는 동안 나 혼자서 얼굴도 없는 회색 인형이 된다. 나도 좀 살아야겠다. 애초에 불가능한 과제는 갖다 버리고, 엄마 옆에 붙어서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 바야흐로 독립 같은 거 못 하는 시대가 됐어요. 우리 서로 사랑하며 살아봐요. 엄마가 사줬던 <찔레꽃 울타리> 시리즈에 나오는 들쥐들처럼 집을 가꿀게요. 들쥐들처럼 청소를 할게요. 들쥐들처럼 요리를 할게요. 저는 자라서 들쥐가 됐어요.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손 야무진 사람들은 집을 식물처럼 가꾼다고 했다. 지금 있는 공간을 쓸고 닦아 점점 더 사랑하는 곳으로 만든다고 했다. 물건을 들일 땐 여유를 가지고, 필요한 것이 나타날 때를 기다리면서 산다고 했다. '여기에 이거 필요하지 않을까' 하면 그걸 정말로 만날 때까지 기다리고, 찾아 나서도 마땅한 게 없으면 그냥 더 기다린다고. 그러다 비로소 만나면 반가이 집 안에 들이는데, 기다리기 힘든 마음에 '아쉬운 대로 하는 선택'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이지 무엇 하나 억지로 급하게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과 마음을 쓰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안타까운 건 내 쪽이다. 하루를 살아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낫다. 나는 살림꾼들이 인테리어와 살림법에 관해 쓴 책을 찬찬히 넘기면서, 집 가꾸기라는 것이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사치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내 몸이 들어가 있는 공간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결심. 쉬운 선택과 체념으로 삶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을 망치지 않으려는 움직임. 뭉텅뭉텅 사들인 '아무거나'로 가득한 방안에 자신을 구겨 넣지 않겠다는 꼿꼿함, 그걸 지키는 일. 가장 안쪽에서부터 무너지는 인생을 떠받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

  사이즈가 작아 영 제 역할을 못 하던 버섯 모양 수저받침을 화분 가장자리에 심었다. 버릴까 하던 것을 흙에 심는 기분이 묘했다. 꾹꾹 누르면서 생각했다. 내가 바닥재 얘기에 눈물을 짤 정도의 인간이라면 나도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아무리 돈 없고 돈 나올 데도 없다지만 그렇다고 눈코입도 없는 회색 덩어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버섯은 잘 심기었고 식탁이 아닌 화분에서 나름의 귀여움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래, 계속해서 이렇게, 앞치마 허리에 두르고 탁탁 쳐가며 살자. 살아가자.

매거진의 이전글 애도의 끝자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