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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19. 2021

줄줄이 쏘세지


  돈이 콩이면 좋을 텐데. 물에 넣어 불리게. 미역이면 어떨까. 금세 넘쳐흐를 텐데. 하지만 내 돈은 콩이나 해조류라기보단 씨앗류에 가까웁다. 그래서 난 돈을 마른 호박씨처럼 까먹지. 그릇에 담긴 호박씨 줄어드는 속도가 심상찮다. 오도독-오도독. 이것이 언제 동이 날 것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릇이 비는 속도를 체크하는데, 쥐포 트럭이 지나간다.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것은 왜냐하면, 국민 간식 쥐포가 오늘은 도매가 40마리에 만 원이기 때문에. 차량에서 바로 구워서 끝내주게 맛이 좋은 쥐포를 누구라도 한 번 맛봐야 하는데, 쫄깃쫄깃 고소하고 맛 좋은 쥐포를 40마리 만 원에 살 수 있는 기회는 오늘 잡아야만 하는데, 거기에 더해 오늘 아침 직접 직화로 구운 아귀포, 아귀포. 영양 만점 아귀포까지- 정말 끝내주게 맛있는 아귀포도 오늘 정말 싸게 팔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맛을 보고 알뜰 구매해야 되는 찬스. 게다가 이 사장님은 아이들, 남녀노소 정말 좋아하는 버터구이 오징어도 도매가로 판매하고 있다. 끝이 아니다. 판매 차량은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올지...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호박씨 한 줌을 쥐어다가 쥐포 사장에게 넘겨준 것이다. 


  한정된 자원이 소비의 우선순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우리 집엔 썬 크림이 없고, 내가 쥐포 트럭을 따라나선 것은 단순한 쇼핑이 아니라 미래를 건 선택이었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썬크림이 쥐포와의 대결에서 완패했다는 뜻이다. 나는 태양이 두렵지 않은 인간이구나. 비슷한 대결로는 바디 로션과 치약 중에 치약의 승리가 있다. 향기는 필요 없은 지 오래다. 버석대는 각질엔 동생네서 얻어온 바세린을 바르자. 나는 치과 치료비를 미리서 아낄 줄 아는, 아주 돈 관리에 똑부라지는 인간이로다. 그래, 인간이라면 미래를 준비할 줄 알기 마련이지, 암, 그렇고말고. 앗차차,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벌써 시간이 됐다. 동생네로 갑시다. 가는 길에 과자 한 봉질 사 오면 나도 한 봉지 고르게 해준답니다. 오랜만에 먹는 과자이니 짜거나 맵거나 아주 얼굴이 찡긋해지는 과자로 고릅시다. 오는 길엔 그 집에 남은 야채, 운 좋으면 과일을 얻어올 수도 있답니다~ 가방을 맵시다. 출발합시다. 내 비록 인테리어한답시고 건축 폐기물을 오지게 쏟아낸 쓰레기 왕이지만서도, 동생네 집 냉장고를 생각하면 음식물쓰레기 없는 세상을 만드는 지구 지킴이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가 아니겠습니까. 


  이러고 주접을 떠는데 구멍가게라기엔 선반이 15개도 넘는 저기 보이는 저 동네 마트가 폐점을 한다고 써 붙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내가 과자 한 봉질 사러 자꾸 씨유로 가기 때문인지... 아무튼 마트 사장은 가게 운영이 깨져버린 천 피스 레고 블럭처럼 다시 시작할 엄두조차 안 났기에 문을 닫기로 한 거겠지만... 물건이 안 팔리기 시작한 건 언제였을까? 물건이 안 팔려서 손님이 없었던 걸까 손님이 없어서 물건을 갖다 놓을 수 없었던 걸까. 닭이 먼저인가 알이 먼저인가.... 물건이 안 팔리면 물건을 갖다 놓을 수 없고 손님이 줄어들고, 손님이 줄어들면 물건을 갖다 놓을 수 없고 물건이 안 팔리고...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망할만한 인간은 여자가 집 보러오면 모른 척하는 오리온 부동산 배불뚝이 사장뿐인 것 같은데, 왜 오리온 부동산은 건재하고 애꿎은 동네마트만 망하는 것일까. 결국 이 나라에선 땅 가진 놈이 이기는 건가. 어제 본 책에서 행운의 신은 앞이 안 보인다고 하던데 동네마트 사장님은 오리온 부동산 사장 같은 놈을 부러워하지도 자기 업종을 후회하지도 말았으면, 하고 바라본다. 세상에 망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일단 잘해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냥 행운이라는 게 여기가 아닌 어디 아무 데나 떠돌고 있는 모양이니까요.... 


  사람은 왜 망하고 난리인가. 슬프게시리. 갑자기 얘기가 여기로 왔지만 그렇다고 내가 망했기 때문은 아니고... 아닌가, 망했나. 아, 망했는갑다. 숙연해진다. "저는 돈 안 되는 것만 해요~"라고 눈웃음을 짓던 동생 친구만큼의 귀여움도 없으면서 나는 어쩜 그렇게 진지하게 돈 안 되는 것만 해 온 것이야? 진지하지 말 것을, 차라리 귀엽지, 귀여운 게 나은데. 귀여울걸. 귀여웠어야 했다. 그러면 돈이 없고 덜 아팠을 텐데. 돈이 없고 안 아픈 게 더 좋은 건데. 어머, 잠깐만, 웃는 걸 잊어버렸다. 웃자, 나야. 처키처럼 웃자. 눈은 가만히 있어도 입은 웃자. 웃으면서 글을 쓰자! 입이 웃으면 몸이 속는다고 했으니까 몸을 속여야 한다. 몸이라도 안 아프려며는... 그래 뭐 이건 또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정말이지 가끔은 나도 돈으로 도피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어디 가서 혼 빼놓고 일하면서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것만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도망갈 데가 없어서 좀 그렇다. 나는 여기 이렇게 앉아서 많은 시간 생각을 하고, 명상을 하고, 나를 맞닥뜨리고, 망했구나! 하고, 처키처럼 웃고... 이건 수련인가. 그런데 이 수련은 맹점이 있다. 큰 맹점. 내가 어딘가로 도망치지도, 회피하지도 못한 채 나에게 붙들려 있으니 호박씨가 바닥나는 데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그것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쉬고 싶을 때 쉬면서, 돈만 못 벌고 있다. 불안은커녕 초조하지도 않다니. 내가 지금 끓는 물 속의 개구리처럼 슬슬 익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행운이라는 것이 내게 달려와 안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당최 헷갈린다. 아 참, 그렇지만 행운이 그런 생각을 한다 해도. 그는 앞이 안 보이... 
  이 수련은 언제 끝나는가. 정말로 신은 날 아는가. 날 보고 있는가. 보고 있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호박씨 리필이나 좀 해줄 수는 없는가,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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