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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n 27. 2021

이름으로부터


  이름 바꾸고 싶은 생각 없어?
한 사람에게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았다. 너는 어떤데? 되물으니 대답 대신 배경 설명이 돌아왔다.
  있잖아, 일본에는 주민 등록이라는 게 없어서 이름도 성도 다 바꾸고 아예 다른 인간이 되는 게 가능하대. 실제로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져서 새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대.
이야기는 '모두에게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볼 기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말로 끝났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그냥 이 애가 다시 살고 싶은 부분이 있나보다 생각했다.


  다시 살고 싶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나를 규정해 버린 이 이름으로부터, 이 이름에서 비롯된 것만 같은 삶으로부터 멀리 도망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더 이상 이 이름으로 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고, 이 세상 어디에 이 이름을 갖다 대도 그 이름과 내가 연결되지 않기를 바란 적이. 사라져버린다는 안전하고 서글픈 일이 내게 일어나기를 아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었다. 사람이 자기 이름에 부응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 사람에게 딱 맞는 이름이 와서 붙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결국 사라져 버리는 게 내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일 같기도 했다. 이슬처럼.


  아빠는 어떻게 생각할까? 여전히 이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할까? 우리 막내 고모는 아들 이름을 '착하고 의로우라' 지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사실상 '맑고 깨끗하라' 지었을 내 이름도 후회의 대상으로서 손색없는 것 아닌가. 고모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들에게 정말로 미안해했다. 어떡하니, 착하기만 해선 안 되는데 애가 저렇게 되어버렸어. 고모의 근심 어린 얼굴을 보면서 나도 당장 죽은 아빠에게 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내 이름을 보자기에 바리바리 잘 싸서 아빠를 만나러 가자. 만나서 얘기해보자. 아빠, 내 이름은 해가 뜨면 사라져버려. 힘없이 증발해버려. 추우면 얼고, 더우면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맑은 게 문제가 아니야. 깨끗한 게 문제가 아니야. 이건 힘 있게 곧게, 당차게 살아갈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잘사는 곳인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요. 이거 반납할게. 다시 주든가. 그럼 아빠는 어떤 얼굴을 할까. 상상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져 버려서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이건 어떨까? 아빠, 이 이름은 참 예쁘지만 사람들이 자꾸 놀려. 특히 아저씨들이 꼭 한 번씩 들먹거려. 문제는 그 아저씨들이 주로 윗사람이라는 거야. 가끔은 그게 희롱이었던 것도 같은데 자기들은 농담이라고 하면 내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어? 아빠, 세상이 그래. 가급적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고. 튀어선 안 돼. 맞아... 그래야 살 수 있어. 이건 정말이야. 말 그대로 살해당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아랫집 부부는 집에 남자가 있다고 집 앞에 부부 명패를 또박또박 써서 걸었지만, 우리 집엔 남자가 없어서 택배 수령인 이름을 가짜로 써요. 아빠, 그냥 내 이름을 아무 남자 장군 이름으로 짓지 그랬어. 그럼 사람들이 내 글에 대뜸 토 달지도 않고, 자기가 한 수 가르쳐준다는 듯 나대지도 않고, 내 명도 더 길 텐데.... 하지만 이조차 아빠에게 뭐라고 할 것은 아니어서 의자에 도로 엉덩일 붙이고 앉는다. 나를 낳은 두 사람이 내게 준 최초의 선물에는 잘못이 없다.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좋은 것과 소망이 어떻게 나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말을 떠올리느라 고심했을 그 시간이 어떻게 나쁜 것일 수 있을까.


  사실 버리고 싶은 건 내 이름보다도 거기에 주렁주렁 따라오는 기대와 선입견 같은 것이니까. 또는 내 이름보다 앞선 역할이나 내 이름을 지우려고 했던 노골적인 시도들. 맞다, 언제나 이름부터 없어진다, 이름부터 없어지지. 이름부터 빼앗겼다, 이름부터. 이름 대신 쓸 수 있는 숫자나 그룹명, 병명, 끝도 없는 역할명 같은 것이 세상에 널렸고, 세상은 바쁘고, 바빠서 빨리 돌아가야 하는 바람에. 이름에 담긴 존재 같은 것을 들여다볼 능력이 없거나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나는 텅 빈 이름이 되곤 했다. 가끔은 편의에 의해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나조차도 양해하고 만다. 하지만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회 속에 산다는 건 집에 돌아와서도 씻을 힘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밖에서 붙은 딱지를 뗄 힘이 없는 일상의 연속은 자꾸만 비극이 된다. 내 이름에 붙은 오해와 내것이 아닌 욕망들을 미처 닦을 새 없이 잠들고, 여직 묻어있다는 걸 깨닫기도 전에 출근해야 하는 날들이 나를 지웠다.


  이름이 깡통이 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다시 처음으로.... "시인이 되어도, 작가가 되어도 멋있지 않겠냐"는 꿈같은 작명의 이유와 들떠있었을 표정들. 세 살짜리가 들썩거리며 춤을 출 때 "잘한다 이실이, 잘한다" 손뼉 치며 내 이름을 외쳤다는 할머니의 몸짓. 말을 떼고부터는 30년 동안이나 쭉 "이슬이 언니, 이슬이 언니"라고 나를 부른 동생의 목소리.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이름이 두툼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나를 부를 말로 그 이름을 선택해주었다는 것, 그 이름과 내가 연결되었다는 것, 한 번 두 번 불리울 때마다 나는 그 이름이 되고 이름은 내가 되고... 그 과정이 결코 혼자서는 될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까지 미치면 이내 아무래도 아까운 이름이 된다. 아껴서 숨겨놓을지언정 버릴 수는 없는 이름이 된다. 내 허락도 없이 내 운명을 가로질러버린 이름이지만 이토록 애틋한 것이라면 얼마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 이름에 두께를 쌓고 싶어진다. 도망은 칠 만큼 쳤으니 이제 있는 자리에 서서 버텨볼까. 사라지지 않고, 사라지지 말고.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를 주먹 쥐어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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