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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 Jul 03. 2021

깊은 잠의 왕


  엄마가 자면서 푸-푸- 하는 소릴 낸다는 의혹이 오랫동안 있었다. 잠귀 밝은 아빠가 제보한 것으로, 당사자는 세상모르고 자는데 자기만 잠을 설치는 게 여간 얄미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몇 번이고 계속된 제보에도 엄마는 절대 안 믿는다는 얼굴로 아빠의 예민함을 탓했고, 사실 아빠는 시계 초침 소리에도 잠을 못 이루는 사람이긴 했어서 가족 구성원 모두가 엄마 쪽 주장에 힘을 싣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제보자는 불의의 사고로 더 이상 제보를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눈물.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음이 사후에야 밝혀진 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을까. 엄마와 한 침대를 쓰게 된 내가 아빠가 겪은 일들을 똑같이 겪고 있다. 푸푸 맨. 우리 엄만 푸푸 맨이다. 아빠, 미안!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면 전원 버튼 OFF 눌린 듯 침대 위로 쏟아지는 엄마는 팔을 하늘로 뻗고 나비잠을 잔다. 그런 엄마가 "나도 백설 공주처럼 자고 싶어"라고 하는 건, 잘 때 팔 뿐 아니라 다리까지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때문인데... 엄마, 근데 백설 공주는 그거 혼수상태였던 거여. 좋은 거 아니야, 반 죽었었다고. 어떻게 디즈니 공주들이 우리 잠자는 포즈에까지 마수를 뻗치게 됐는지 통탄할 노릇이오만, 아무튼 보통은 엄마보다 늦게 자고 엄마가 푸푸 거리는 동안 두 손 모으고 천장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지금 이 현장을 공유하고 증언을 풍부하게 만들 첫 번째 증인, 아빠가 없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 푸-푸- 말 그대로 푸푸다, 푸푸. 이제 누가 내 말을 믿어줄까. 


  엄마 어제도 푸푸댔어.
  아침에 일어나서 엄마의 푸푸잉(푸푸-ing, 푸푸거리는 행동을 뜻하는 마음대로 지은 명사)을 고발하는 건 엄마의 '나 어떡해~!'하는 얼굴을 보려는 심보가 크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 3년쯤 지나니 이젠 자면서도 엄마를 톡톡 쳐 푸푸 스탑 컨트롤이 가능한 수준이 되기도 했고, 자는 모습에서 평소 엄마의 털털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정말 우습고 말 그대로 귀엽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 온몸으로 새어 나오는 고유함. 집에서 새는 바가지... 아, 이건 아니고. 엄마의 푸푸대는 옆얼굴을 보고 있으면 내가 잠이 안 오는 날일수록 어이가 없어서 피실피실 웃음이 난다. 어젯밤에는 고양이가 낮잠 자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아 그 위에 얼굴을 놓고 엎드려 자는 모습도 목격했다. 나는 이렇게 잠이 안 오는데! 기가 막혀라. 피실피실. 


  엄마는 아빠 이외의 증인이 나타나 자신의 푸푸를 한 번 더 폭로한 이후로 어디 교회 수련회나 사람들과 멀리 가는 여행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해도 되는 것이 의식도 없는 몸이 마음대로 구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다. 이를 갈거나 코를 골거나, 푸푸대거나 뿡빵대거나 매한가지다. 사회적 삶의 영역에선 있을 수 없는 일. 게다가 의식조차 없으니 시정도 못 한다. 곤란하다 곤란해! 좀비를 생각할 때 암담한 이유도 그들이 의식이 없기 때문 아닌가. 의식이 있으면 소통이라도 될 것이고, 소통이 된다면 협상의 여지 같은 것이라도....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면의 밤이 없다는 건 꽤 잘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푸푸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오바하자면 좀 자랑스러워해도 되는 거 아닐까. 실제로 놀러 간 김에 자랑도 좀 하고. 자랑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그냥 평소처럼 자면 된다) 

  분명 친구들이 아주 부러워할 것이다. 어두운 방에서 눈을 끔뻑이며 '어떻게 저렇게...' 같은 생각을 하겠지. 그러나 여러분, 천재에겐 '어떻게'가 없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나 어떻게 하면 아주 적절-히 의식을 놓을 수 있을까 고뇌하고, 의식을 너무 놓아버리면 요단강 입구까지 가게 돼서 안 된다, 또 너무 못 놓으면 가위나 눌리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나 보게 된다 발을 동동거리지만, 천재에겐 '그냥'인 것이에요. 사실 그 적절한 선에서 의식을 살짝 놓았다 잡았다 해가며 꿈의 세계를 떠도는 건 너무나 아찔할 정도로 행운이 필요한 예술인 것인데... 아무래도 우리 엄마는 타고난 천재고, 말하자면 수면 계의 모차르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잠 한숨 편히 못 자던 아빠로서는 딱 살리에르가 된 느낌이었겠구나 싶다. 부러우면서도 얄밉고, 얄미우면서도 부럽고 근데 또 잠은 안 온다...! 열심히 푸푸잉을 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아빠의 잠 못 들던 밤이 떠올라 맘이 찡해진다. 새벽에 꼭 한 번씩 방문을 열어 우리 자매 잘 자는지 보고 가던, 뒤에서도 배 나온 게 보이던 그 실루엣. 


  낮의 모든 걸 잊어버리기, 손에서 살짝 놓아버리기, 오늘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기기. 아마 나도 아빠도 이런 게 잘 안되는 사람인가보다. 놓을 수가 없나보다, 편해질 수가 없나보다, 뭔가 더 해야할 것 같은가 보다.... 분명히 우리에게도 노력하지 않고도 잘 자던 때가 있었을텐데. 어쩌다 우린 자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살게 되었을까. 꼭 억지로라도, 단 몇 시간이라도 자야 하는 존재라는 걸 몸이 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깨어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걸까. 아무도 날 위협하지 않는데, 무엇도 날 잡으러 오지 않는데.... 나는 나를 잡으러 온다고 한 것들의 목록을 적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모두 상상 속의 괴물들뿐이라 시시해졌다. 밤은 언제나 까맣고 고요하다. 나는 천재의 발끝이라도 따라가 보려 밤 10시에 이불을 말아 덮는다. 그래도 날마다 옆자리에 푸푸 맨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지. 아기가 낮잠 잘 때 엄마도 잠이 오는 것처럼, 고양이가 낮잠 잘 때 집사도 잠에 빠지는 것처럼, 푸푸 맨이 밤잠 잘 때 나도 같이 곯아떨어져 보자. 푸푸 맨의 기운을 받아, 오늘도 잘 자자. 코 자자. 도와줘요, 푸푸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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