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라는 건 어쩜 이렇게 정확한지. 입추가 지나니 새벽마다 바람이 차다. 이제 민소매를 입고 자기엔 어깨가 좀 시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얇은 이불 한 겹만으로는 솔솔 춥다. 주섬주섬 반팔 옷을 꺼내 입고 도톰한 이불도 더하고 나니 이걸 어쩜 좋아, 갑자기 설레는 동시에 겁이 나기 시작한다. 가을이 온다. 언제와도 낯선 가을이! 후끈한 여름을 견디는 동안 열 수 있는 만큼 활짝 열어대던 창문을 닫아 놓고선 낯설어지는 기분에 머리를 굴렸다. 이번 가을은 준비라는 걸 해 놓으면 어떨까? 너무 덜컥 오지 않게. 그래서 요즘 나는 창문 너머 쪽하늘에 얼굴을 들이밀고 '너 가을이 오면 어쩔래? 가을이 오면 어떻게 할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사실 준비라기엔 으름장에 가까운 질문뿐이다. 가을이 오면 어쩔 것인지 매번 대답은 못 하고 있고.
아주 자연스럽게 가을로 스윽 넘어가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걸까. 봄에서 여름은 그렇게 오고 가을에서 겨울도 그렇게 가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것도 스무스하고 부드러운데 가을만 매년 덜컥 온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한창 땀 흘리고 있는 중에. 땀 한번 닦으려고 허리를 펴서 고개를 들면 거기에 가을이 있다.
헉, 가을!
끝도 없이 높아진 하늘에 세상은 더 커져 있고, 그 세상 위에서 나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존재가 된다. 순식간에 작아진 내 주위로 그동안 미처 못 느꼈던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면 비로소 가을이 온 것이다. 재작년에는 갈월동의 한 터널 앞에서, 작년에는 어느 아파트의 구름다리 위에서였다. 정말이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라 나는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가을 앞에 선다. 그래서 터널 앞 신호등의 초록 불이 몇 번이나 빨간 불로 바뀌는 동안, 그림같이 생긴 구름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옮겨가는 동안 입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서 있어야 했다. "허어어, 가을이네..." 하면서. 준비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하루아침에 가을을 맞는 모습. 누가 가을로 때린 것처럼 가을을 맞기.
적응되고 나면 가을만큼 아름다운 계절이 또 없건만 가을의 초입에서 나는 어김없이 삐걱댄다. 왜냐하면 가을이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몰고 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올 거면 딱 하루, 그만큼만 낯설 일인데 그렇지가 않다. 어제까지는 더위로 꽉 차 있던 공기가 하루 만에 탁 트인 다음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그럼 나는 말 그대로 공-허-함. 비어버린 허공의 밀도가 내가 보낸 여름의 더위와 습도를 모두 합친 것만큼 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하루만큼의 공허함이 아니다. 지난 여름날을 전부 손꼽아 세어 더한 만큼의 허전함이다. 아, 너무해! 그러니 이것을 견뎌야 한다는 막막함까지 살짝 스치면 28인치 캐리어 세 개 짊어진 여행객마냥 무겁게, 무겁게 가을로 가는 것이다.
유칼립투스야, 너는 어떠니.
고무나무야, 너는 어떠니.
죽백나무야, 너는 괜찮니?
여름이 하루아침에 없던 것이 되는 동안 우리 집 죽백나무와 유칼립투스와 고무나무는 훌쩍 자라있다. 여름은 그런 것이다. 놀랄 만큼 힘찬 것. 다 죽은 듯 보이는 가지에서 엄청나게 윤기 나고 진한 색의 새잎이 나오는 것. 나는 그걸 여름 내내 봤으면서, 매일매일 보고 웃었으면서 어쩜 가을이 올 것을 몰랐을까? 조바심 한 번 내지 않고 말이다.
문득 가을에 도착하면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조금 마음을 떨 것이다. 죽백나무가 키를 쑥 키우고, 유칼립투스가 가지를 넓게 뻗고, 고무나무가 둥글게 잎을 펴는 동안 나만 그대로였던 것은 아닐까, 혹시 모두가 나만 빼고 변했을까 싶은 마음이 하루 만에 몰려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높고 또 높고, 넓고 또 넓은 하늘 아래에서 두리번거리면서 발견하겠지. 여름을 난 세상의 전부를. 이만큼 자랐구나. 다들 그랬구나. 가을 하늘이 높-고 큰 심판자라도 되는 것처럼 하늘에 대고 "잠깐, 잠깐, 잠깐만요! 잠시만요!" 하고 싶어지고, "아... 안 되나요? 어, 저는... 이 여름 동안에...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엉금엉금 지난날을 되짚으며 여름이 끝났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어지고. 이래서 청춘 영화를 전부 여름에 찍는구나. 성장만화가 전부 여름에 시작하는 것처럼.
채 마무리 짓지 못한 여름을 허둥대며 주워 담다 보면 단풍이 질 것이다. 나... 가을, 할 수 있나?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하는데, 정말 모르겠다. 그나저나 올해 가을은 어디서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