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강박

떠나는 여행 말고 머무는 여행 어때?

by 스틸앨리스

집과 작업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고 싶다.

오래전 재미 삼아 봤었던 사주팔자에 나는 발에 복이 있으니 머물지 말고 돌아다녀야 복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 말이 문득문득 떠오르면서 "맞아! 나는 원래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이게 맞나?

어디든 떠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곧 가야지 ~가야지~ 중얼중얼 주문이라도 되듯 늘 허공에 날리는 말에서 심한 강박이 느껴졌다. 정작 공방을 비우지도 못할 거면서.


생각해 보니 언제부터였을까? 팬데믹 이후 작은 공방을 오픈한 뒤로 좁은 공간에서 쳇바퀴 돌듯 몇 년을 보내왔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늘 같은 풍경 속에서 비슷한 하루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처음 공방을 열던 날, 마음속으로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처음 보는 손길로 바느질을 하고,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조금 달랐다.


어느덧 내 일상은 오래된 시계처럼 그저 익숙하게 흘러갔다.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작업실 테이블을 정리하고, 하루 종일 천을 자르고, 바늘을 꿰고, 실을 잇는 동안 꼼짝없이 매여 살았다. 공방크기만큼 내 우주도 좁아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면 어깨의 피곤함과 함께 하루를 닫으며 그렇게 몇 해가 지났다.


요즘 들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익숙함을 잠시 내려놓고, 낯선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다는 생각. 늘 머물던 자리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떠나는 일 자체에 대한 설렘보다, 나를 붙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떨어지는 그 순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 같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차에 몸을 싣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길 위의 작은 카페에 앉아 이름 모를 커피를 마시며 떠오르는 대로 글을 적고 싶은

시간의 여유.


누군가는 말했다. 여행은 언제나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이미 내 마음은 아득히 먼 어딘가의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어차피 멀리 떠날 수 없는 상황을 알아차린 나는 잠깐의 생각만으로도 짧은 호사를 누린다.


발을 내딛는 순간, 그곳이 여행이 된다고. 그렇게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하며, 나는 오늘도 익숙한 작업실 창밖 너머를 바라봤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여행을 상상하고 도착지를

찾아보고 머릿속으로 원하는 여행을 계획해 보지만

당분간 의미 없는 일이란 걸 또 알아차린다. 그런데도

생각만으로 잠깐 리프레시된 느낌이 든 건 왜일까?


그러게 도착은 끝을 의미하지만 상상하고 머릿속으로 계획해 보는 그 짧은 시간이 내 마음에 파동을 일으켜 기분 좋은 도파민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이 되었다.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은 오히려 달리려 하지 않겠지. 나는 늘 마음으로 떠나는 연습을 한다.

언제 도착할까,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하듯 걷고 싶었다.

때때로 발아래 길이 모래처럼 푹푹 빠지고, 마음은 자주 엎질러지지만. 달리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멈춰 섰던 그곳에서, 나는 한참을 머물고 싶어진다.


한참을 머물다 보면, 흘러가는 풍경 속에서 나만 멈춰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질 때가 있다.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떠나는 여행의 길 위에서 잠시 휩쓸리듯 길을 잃은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제대로 멈춰 선다. 흐릿해진 목적지를 다시 떠올리고 흔들리던 마음을 다시 바로잡으며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걷는 게 겨우 동네 한 바퀴일지라도 아쉬움을 접어 두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잠시 길을 잃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적지보다는 발걸음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 흔들리며 걷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이라는 걸, 잠시 멈춰 선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나는 이제 다시 길 위에서, 흔한 여행을 한다.

출근길, 퇴근길, 산책하는 길 위에서

진짜 여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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