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돌아오고, 오늘따라 느끼는 계절의 감정들
어느새 여름이 자취를 감추듯, 새벽 창문으로 스며드는 가을 공기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온도의 변화일 뿐인데, 그 공기 속에는 이상하게도 손끝으로 만질 수 있는 듯한 감정의 결이 묻어 있다. 마치 바람이 마음의 창을 두드리듯, 계절은 우리에게 늘 감정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남겨주는 걸까.
아, 시원하다. 머릿속은 마치 바람에 굴러다니는 낙엽처럼,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뮬레이션하고 있었고, 침대 한편에 구겨져 있던 이불은 이미 내 온기마저 사라지고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 발끝은 그 냉기를 참지 못한 듯 본능적으로 이불을 더듬었다. 밤새 켜둔 선풍기 바람이 이렿게 차게 느껴진 건 올여름 처음이다. 차가운 발밑으로, 이불의 가장자리가 스르르 끌고 들어왔다. 그 순간, 몸과 마음은 동시에 계절의 한 조각을 만진 듯 파르르 떨며 가을 아침을 실감했다.
아~~ 계절은 못 속이는구나.
사람은 흔히 감정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계절 앞에서 늘 반문하게 된다. 과연 감정은 만질 수 없는 것일까? 바람이 스치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공기가 달라지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감정의 질감을 느낀다. 기쁨은 가볍게 날리는 바람처럼, 슬픔은 어깨를 짓누르는 돌처럼, 쓸쓸함은 피부 위에 내려앉는 차가운 이슬처럼 만져진다.
쓸쓸함은 특히 가을에 짙게 깃든다. 그것은 단순히 외로움과 같지 않다. 외로움이 타인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면, 쓸쓸함은 오히려 ‘내가 이곳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증거에서 시작된다. 한때 웃었던 기억, 이미 떠나간 사람,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계절들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래서 쓸쓸함은 결핍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충만의 언어다. 상실이 남긴 여백이자, 살아 있음이 만들어낸 깊이랄까?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존재를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이라 말했다. 생각해 보면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감정은 단순히 마음속에 떠도는 추상적 기운이 아니라, 몸을 통해, 오감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된다. 우리가 공기의 차가움을 감각하며 쓸쓸함을 느끼는 것도, 결국 감정이 몸의 감각을 빌려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정은 만질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공기를 만지고, 그래서 동시에 감정을 어루만진다.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삶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끝으로 확인하며 나아가는 여정인지 모른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만지려는 몸짓이고, 그리움은 지나간 시간을 더듬는 손길이다. 기쁨은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순간을 꼭 움켜쥐는 힘이며, 쓸쓸함은 사라져 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용한 포옹 같다.
우리가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은 더욱 선명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져지는 감정들은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계절이 변하듯, 우리의 마음도 끊임없이 변주되는 건 그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성숙한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음이다.
가을 새벽의 공기 속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삶이란 결국 감정을 만지며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감정들이 때로는 차갑고 무겁더라도, 그 모든 감각이 나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져지는 감정들이 쌓여 결국 내 안의 세계를, 나라는 존재의 지도를 완성해 간다는 것을.
자리에서 순간 벌떡 일어나 베란다문을 활짝 밀어 본다.
이미 사람들은 운동하기 위해. 출근하기 위해 발끝을
서두른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