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기억하는 계절이 오면

by 스틸앨리스

아침저녁 바람이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열기만 남기던 바람이었는데, 이제는 불어오는 순간 팔에 닿는 온도부터 다르다. 덥다, 춥다의 구분이 아니라 "아 시원하다", 기분 좋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몸은 지난가을을 기억하듯 제일 먼저 반응하는 걸 보면 사람도 자연도 결국 같은 법칙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가 먼저 색을 덜어내듯, 우리 몸도 어느새 온도에 적응하고, 마음은 그 변화를 따라간다.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던 색이 어느새 물기를 조금 뺀 듯하고 진한 초록이 살짝 옅어지고, 그 속에서 또 다른 계절이 오는 것을 미리 알리며 색으로 말을 건네는 건 자연.


바람의 온도 때문인지 저녁이 되면 가볍게 걷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며칠 전, 동네 개천을 따라 나무가 빼곡히 늘어선 길을 걸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의 속도로 길 위를 채우고 있었다. 걷는 이, 달리는 이, 두 바퀴를 힘차게 굴리는 사람들까지. 누구 하나 같은 리듬은 없었지만 모두가 자기만의 루틴을 찾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다.


‘운동만큼은 진심’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그 모습은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길을 걷다 보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방학 끝자락, 저녁이 되면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 낯설지 않게 반복되던 그 소리가 계절의 이정표였던 것처럼, 지금 내 곁의 바람과 나뭇잎도 그렇게 말을 건네고 있다.


그때는 그렇듯 동네 어르신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허리를 밀어내기도 하고, 기묘한 각도로 팔을 벌리며 몸을 풀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다소 과장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의 신체 단련이었고, 동시에 그 진지함 속에서 은근한 유머가 묻어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풍경.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저녁의 한 장면이었다.


오늘 불어온 바람, 나무의 색감, 지나가는 저녁 공기만으로도 하루의 피로를 풀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우리가 살고 있다는 숨과 그걸 느낄 수 있다는 감사가 있었기에. 삶은 이렇게 느껴지는 순간마다 특별해지는가 보다.


사림도 자연도 온몸으로 다가올 계절을 느끼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서서, 바람을 맞는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분명히 만져지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지나가는 공기가 아니라, 나를 이곳에 존재하게 하는 작은 기억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큰 의미와 성취를 좇으며 현재를 놓치곤 하는데 삶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문득 스쳐가는 바람, 옅어지는 잎의 색, 풀벌레 소리 같은 작은 것들이 진짜 삶의 배경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오늘 어떤 순간을 만져보았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어루만지고 지나간, 그 조용한 감정의 흔적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 작고 선명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짓는 것 아닐지. 어느새 또 하루를 저장하기 위해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걷다. 달리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다가오는 계절을 느낀다. 몸이 기억하는 계절, 그 계절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음의 느낀다. 덜어낼 때를 알고, 움츠릴 때를 알며, 또다시 피어날 때를 안다. 계절이 가르쳐 주는 이 단순한 순환이야말로, 우리가 매 순간을 살아가는 태도의 모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