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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10 더 많이 해보면 괜찮아 질거야

그것은 그저 경험의 문제였다.

여자친구가 간단한 도움을 청해왔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데 조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팀 과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팀원들이 각각 PT할 부분을 나누어 맡았다고. 발표 길이는 5분 남짓. PPT 장표는 네다섯 장에 불과했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닌듯 싶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PPT를 보면서 읽으면 끝날 문제였다. 팀 과제였고, 수정할 수 없는 장표였으며, 분량도 그리 길지 않은데다가, 무엇보다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한 가지는 감수해야 할 뿐.


그런 발표는, 당연히 지루하다는 것.


그 점을 극복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것이 물음의 골자였다. "끝내주는 뭔가를 할 수는 없겠는데"가 나의 첫 반응이었고, 전화기 건너편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주는 무언가를, 발표 바로 전날 밤에 구상할 수는 없다. 그저 예상가능한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양념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다행히 장표를 보면서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자친구도 좋아라 했다.


하루가 지났다. 발표 잘 했느냐고 내가 물었다. 저 멀리의 목소리가 그닥 좋지 않았다.
요컨대 결과는 이랬다.


"망했어요."



자신감이 물먹은 짚단처럼 쓰러져 있었다.


안쓰러웠다. 연습을 했는데, 원고도 외웠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니 가슴이 떨리고 말문이 막히면서 준비한 스토리가 돌처럼 굳었다고 했다. 그러니 차라리 음성지원 프로그램처럼 PPT를 읽느니만 못한 결과가 되었다고. 면접 때 새하얗게 백지가 되었던 기억을 극복해보고자 애를 써 본 것인데 결국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토닥토닥 달랬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사람 앞에 서면 늘 두렵고 떨려요', '매번 이러니 다음 번이라고 잘 해낼 것 같지 않아요' 하는 식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몇 번을 연속하여 실패를 경험하면 '나는 못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우리네 마음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모양으로 생겼다.  


"그래, 이번이 몇 번째에요?"
"세 번째요."


그렇게 어깨를 두드려주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맞다. 나 역시 그랬었다. 사람들 앞에 서서 가슴이 떨리고 말문이 막히고 그랬던 기억.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종교와 명상수행'이라는 과목을 들었더랬다. 등록금을 내고 4년 동안 관악산 언저리에 엉덩이를 눙치는 동안 그나마 추억으로 남은 몇 안되는 재미진 수업이었다. 주로 불교와 도교, 그리고 수피즘의 신비주의 수행에 대한 내용.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올법한 말들이 버젓이 대학교 강의실에서 오갔으니 흥미롭지 않을리가 있겠는가.


그 과목에는 과제와 발표가 있었다. 자유롭게 주제를 택해 한 학기 내내 리포트를 준비하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꽤 다룰 내용이 많은 주제를 선택했다. 제목하여, '불교 수행과 건강 증진'. 명상과 호흡 수련, 절 운동 등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들을 망라하고 그것들이 우리네 심신에 미치는 영향을 당시로서는 제법 신선했던 뇌과학 이야기까지 토핑으로 얹어 구워냈다. 글자 포인트 10으로 빼곡하게 A4 용지 스물 다섯장. 3학점짜리 교양 선택 과목 수업치고는 나름 열심히 작성한 과제물이었다. 내가 흥미를 느낀 과목이니 그랬을 것이다.


발표일이 다가왔다. 나에게 할당된 시간 - 20분동안 그 개략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당시에는 PPT를 쓰지도 않았다. 법대에는 PPT를 사용하시는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나는 그때 PPT가 무엇인지 아예 몰랐다. 나는 과제물을 출력하여 손에 들고, 장농처럼 커다란 발표대 뒤에 숨어서 군데군데 읽을 생각이었다. 그저 필요한 경우 초록색 칠판에 분필로 판서나 좀 하면 되지 뭐.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단상에 올라가보니, 그게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섰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심장이 드라이 아이스를 쏟아부은듯 차갑게 식었다. 다른 사람들은 호흡이 가빠지거나 얼굴이 달아오른다는데, 내게 나타난 증상은 저체온증이었다. 손발이 냉동실에 집어던진 고기덩어리처럼 차가웠다. 그 순간 누가 악수라도 하면 시체 손인줄 알고 화들짝 뒤로 물러나리라.


시작부터 그리하였으니 잘 될리가 있겠는가. 나는 흑마술사의 주문에 정통으로 맞은듯 온몸이 빠직빠직 얼고 있었다. 심장에서 시작된 냉기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마침내 성대까지 침범했다.


"흐어어어..."


말꼬리가 떨리더니 가스처럼 샜다. 발표대를 엄폐물 삼아 온몸의 경련을 감추고 있다 한들, 목소리의 떨림마저 엄폐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애써 웃음을 참는 것이 분명한, 그런 종류의 굳음이었다. 그 앞에서 상황을 호전시키는 것은 기름을 잔뜩 먹인 동앗줄을 잡고 위로 올라가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발표는 엉망이었다. 내심 '나는 잘 하지 않을까' 했던 미나리 뿌리만한 믿음이 깨끗히 뽑혀나갔다. 컨텐츠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위 '말빨'의 부재는 더더욱 아니었다. 핵심은 단순했다. 그저 내 몸이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견디지 못했을 뿐. 그것은 전투기 파일럿 후보생이 중력 가속도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처럼, 의지와 의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왜 그랬을까.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왜 그렇게 팽팽하게 당긴 실처럼 바르르 떨어댔을까.



다시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온 몸으로 받고 선 것은 회사에 들어오고 난 이후의 일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발표였다. 10분짜리를 준비했고, 시간 조절에 실패하여 12분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한, 제법 괜찮은 PT였으니까 말이다. 발표를 끝내고 내 자리에 돌아왔을 때, 인트라넷으로 '잘 들었다'는 쪽지가 엄마손 파이의 속살마냥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 때 비로소 나는 흑마술사의 저주, 빌어먹을 저체온증에서 무사히 벗어났다.


문득 생각했다. '불교와 건강증진'의 나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나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단지 20대와 30대의 차이일까. 아니면 '군대를 다녀와서' 철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소맥과 야식이 차곡차곡 올려놓은 간수치가 남들의 시선을 무디게 만든 것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중, '아차'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답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지 10년치 쌀밥의 기적이 아니었다. 직장인 생존 본능의 발현도 아니었다. 호랑이도 때려잡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제대자의 위엄 따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경험'의 문제였다.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일이 많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짧으면 15분이요 길면 한 시간. 최소 서른 명에서 많으면 백 명을 앉혀놓고 수다를 떨었다. PPT도 없었고, 칠판도 없었다. 마이크조차 없이 깡 목소리로 펼쳤던 쌩 라이브 토크쇼였다. 거칠게 잡아도 일백번은 넘게 했을게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 훈련병들을 앉혀놓고 시간을 때우는 것이 나의 비공식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임무였다. 주의를 집중시키지 않으면 훈련병들은 담배연기처럼 흩어져 수다를 떤다. 일단 수다가 터지기 시작하면 윽박지름의 단순 반복으로는 겉잡을 수없이 시끄러워진다. 그렇게 되면 행사의 5할쯤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간부가 도착하기 전까지, 그 시간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백을 '이야기'로 메꿨다.


그 때의 경험이 내 뱃속에 켜켜이 쌓였던 것임을 문득 깨달았다. 일백의 눈동자에 맞서는 일이, 일백의 귀를 붙잡아 두는 일이, 그렇게 매주 반복했던 시간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두텁고 단단한 무언가를 만들어 냈던 게다. 지금의 내가 사람들 앞에서 덜 떨 수 있고, 덜 차가워질 수 있고, 덜 불편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그 경험들 덕분이었다.


나는 손을 모아 합장했다.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우연찮은 기회와, 기회를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예전의 나에게 감사했다.


"이제 세 번 한 거라면, 당연히 아직 떨리는게 맞아요.


더 많이 해보면 괜찮아 질거야. 중요한 건, 최대한 빨리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거.


지금은 실패하더라도 기회가 있지만, 나중에는 한 번의 실패로 영영 문이 닫길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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