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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Sep 03. 2015

#107 걷지도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

버스를 기다릴까, 그냥 걸어갈까의 갈림길에서

나는 1분에 120보를 걷는다.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때 나오는 보통의 속도다. 남들에 비해 걸음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폐를 끼칠 만큼 느린 걸음 역시 아니다. 맥도널드 토마토 치즈버거를 들고 먹으면서 걷거나 점심 식사 이후 직장 분들과 아랫배 윗배를 두덕두덕 두드리면서 걸을 때는 이보다 퍽 느려지긴 할 것이다. 반대로 횟집 수족관 안에서 열심히 '헤엄'치는 생새우처럼 바지런히 발을 옮긴다면 150보 가까이 나올지도 모르지. 그저  걸리적거리는 사람 없고, 발 아프지 않은 신발을 신었을 때 보통 120보를 찍는다는 이야기다.


문득 분당 걸음 수를 떠올리게 된 것은 출근길의 번뇌 때문이다. 서울의 많은 달동네가 그러하듯 우리 집도 지하철 역에서 버스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다. 완연한 달동네는 아니고 달 허리께쯤에 있는 동네긴 하지만 그래도 가까운 골목에 초록색 마을버스가 부우웅하고 다니는 전형적인 신림동 집이다. 시내버스 노선으로 따지면 지하철 역까지 두 정거장.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양자택일의 고민에 빠지기 딱 좋은 거리인 게다.


버스를 기다릴까. 
아니면 그냥 걸어갈까.



내 보통 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와 2호선 신림 지하철 역까지 13분 남짓이 소요된다. 중간에 신호등 하나를 건너야 하기에 1분 어금지금하는 오차가 있다. 만일 그마저도 없었다면 나는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나오는 영국 신사 포그처럼 거의 매일 똑같은 걸음 수로 거의 매일 똑같은 시간을 들여 지하철 개찰구에 닿았을 것이다.


13분.


참 애매한 시간이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면 버스를 타느니 걷는 편이 낫다.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어차피 몇 분은 걸리는 데다가, 출근 시간의 버스는 밥알이 터질 정도로 밀어넣은 유부초밥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서 걸어야 하는 거리가 20분쯤 된다면 또한 고민할 이유가 없다. 중국산 찐쌀처럼 조금 뭉개지면 어떤가. 출근 길의 20분 걸음이면 잘 다듬은 파도 푹 익은 파김치가 된다. 어쩌면 구두 속 새 양말에서 모락모락 꼬랑내가 피어나기 시작할 지도. 그 상태로 도저히 지하철까지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신림역까지는 요것이 13분이다. 단숨에 훨훨 걷기에는 조금 멀다 싶은 느낌이고, 다짜고짜 버스를 기다리자니 어떤 날은 '차라리 그냥 걸어갈 걸' 하고 후회하는 일도 생긴다. 한 마디로 어느 쪽이 낫다고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운 거리. 하여 매일 아침 나는 버스냐 걷기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이다. 나의 하루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의사 결정의 순간이다.


아, 물론 '5분만 더 잘까, 그냥 일어날까'는 빼고 말이다.



그런 출근길의 고민이 단박에 해결되었다. 어떻게? 


'원칙'이다. 우리가 사소한 일로 우왕좌왕하는 것은 단지 원칙이 서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른 아침부터 이럴까 저럴까 고민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리고 '아, 저쪽을 택할 걸' 하고 후회까지 하는 것은, 하루의 에너지에도 좋지 않을 영향을  미칠뿐더러 나의 인격을 무디게 만드는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둘 중  한쪽을 택하기로 했다.


어느 쪽일까.


원칙이 뚜렷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해야 할 일이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이면 확실한 원칙을 세울 수 있다. 확실한 원칙이 서면 사소한 일 앞에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


나는 1분에 120보를 걷는다. 13분이면 대략 1500보 안팎이다. 하루 두 번, 출근과 퇴근길에 버스 대신 뚜벅뚜벅 걷기를 택하는 것만으로 3000보가 채워진다는 이야기다. 하루 성인 걷기 권장량인 일만 보의 30%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어제, 체중을 줄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해야 할 일이 보이고, 해야 할 일이 보이면 확실한 원칙이 선다.


조금 전의 퇴근 길,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룰루랄라 걸어 왔다.





<내 마음대로 꼽은 걷기의 열 가지 이로움>


1. 걸으면 생각이 잘된다. 스티븐 킹은 산책을 하며 스토리를 구상했다.


2. 걸으면 오래 산다. 매일 25분 걷는다면 우리는 이 별 위에 7년 더 머물 수 있다.


3. 걸으면 밥이 맛있다. 운동이 최고의 반찬이라는 알렉산더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4. 걸으면 암기가 잘된다. 영어 단어 외우기 지겨우면 메모장을 들고 당장 걸어보라.


5. 걸으면 교통비를 아낀다. 버스 요금 1200원이면 수입콩으로 만든 두부가 한 모다.


6. 걸으면 운이 트인다.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든 채로 팔다리를 쭉쭉 펴며 걸어보라. 금세 기운이 샘솟을 테니.


7. 걷기는 부담이 없다. 걷기 운동조차 안 하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


8. 걷는 동안 음악 듣기에 좋다. 아이돌이 너무 많아 구분이 안 된다면 당장 이어폰을 끼고 나가자.


9. 걷는 동안 전화 걸기에 좋다. '나 이제 퇴근하는  중이야'라는 목소리는 그 얼마나 다정하게 들리는가.


10. 걷는 동안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30년 전 헤어진 친구를 길에서 걷다가 만났다.



84.9kg (-1.1kg)

"중요한 것은 출발 선에서의 도약이 아니라 꾸준한 전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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