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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Sep 12. 2015

#113 하루키는 양복을 싫어한다

라인이 들어가고 힙을 살려주는 수트를 입고 싶다면, 달리기

아침 출근길이다. 


지하철 의자에 몸을 파묻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앞으로도 양복을 사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살면서 그렇게 성가신 옷은 가능하면 입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값도 비싸고, 움직이기에도 불편하고, 쉴 새 없이 스타일이 바뀌고, 드라이클리닝 값도 든다. 아주 드물게 오늘은 한번 양복을 입고 나가 볼까 싶을 때가 있는데, 두 시간쯤 걸어 다니면 '아아, 짜증 난다. 내가 왜 이런 걸 입고 나왔지' 하며 두고두고 후회한다. 양복이란 정말 부자연스러운 옷이다." 


오오오. 휘둥그레진 눈으로 감탄을 했다. 


'브라보 브라보'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하루키의 양복론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도 가끔씩은 양복을 사고,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정도. 에세이를 쓸 당시 하루키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작가였고, 나는 조직생활에 몸을 담고 있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만 빼면 100% 공감. 


옳소, 옳소, 하루키 씨. 



원래 나는 양복을 싫어한다. 


어깨가 좁다거나 특별히 양복이 볼품없는 몸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키가 그다지 크지 않고, 배가 나와서 그렇지 상체도 적당히 발달했고, 다리도 짧진 않다. 내 입으로 말을 하자니 조금 낯 부끄럽지만, 몸 치수를 재던 테일러가 "엉덩이가 단단하게 위로 붙으셨어요." 하고 호들갑을 떤 적도 있다.  요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힙이라나 어쩧다나. 


"검도를 오래 해서 그런가 보죠. 흠흠." 하고 대충 얼버무렸는데, 어쨌거나 (낯부끄러운) 칭찬이라도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 바지를 찾았을 때 실제로 특이사항란에 "힙 작음"이란 메모가 쓰여있는 주문서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씨익 웃기도 했다. 


다행이다. 키 작고 배 나온 주제에 힙이라도 쓸만하니까. 

요컨대, 나란 사람도 양복을 갖다 대면 그럭저럭 보통은 가는 옷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내가 양복을 싫어하는 이유는 양복이란 물건이 굉장히 갑갑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양복을 입었을 때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양복의 갑갑함이 주는 고통을 상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양복에 타이를 매치하고 전신 거울 앞에 서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보다 나이스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나중에 언젠가 텔레비전에 생중계되는 자리에서 카메라를 받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앵글에 잡히기에는 양복이 가장 무난하리라는 것도 안다. 그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솔직히 양복 따위는 아예 입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양복을 싫어하는 나의 기호는 확고한 편이다. 



이런 양복기피증이 체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마이너스 건강법>의 손영기 한의사는 폐실肺實과 폐조肺實 체질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폐실과 폐조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한의사가 이야기한 대표적인 특질들이 예외 없이 내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아, 내가 폐실-폐조 체질이구나' 하고 생각한  것뿐이다. 


이를테면 폐실-폐조는 근육이 덜 발달하고, 식사 속도가 빠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화장애가 적은 편이다. 화창한 날씨보다 비오기 직전의 습한 날씨를 좋아하고, 담배는 물론 향수 냄새까지 강한 향은 본능적으로 싫어하며, 대장이 민감하여 화장실을 자주 찾는다. 심장에 열이 많아 소변이 잦고, 알레르기나 아토피에 취약하다. 영락없는 나다. 나의 DNA를 샅샅이 뒤져가며 만든 질병 리스트 같다. 나는 정말로 어느 한의원을 가던 "심장에 열이  많으세요."라는 말을 항상 들었다. 빼도 박도 못하는 폐실-페조인게다. 


그런데 폐실-폐조는 몸의 표면에 양기가 모이는 체질이라 꽉 조이는 옷을 지극히 싫어한다고. 내복이나 청바지도 마찬가지. 목을 감싸는 폴라티는 말할 것도 없다. 스릴러 영화에서 목이 졸려 죽는 희생자들 중에 부디 폐실-폐조가 없기를. 아무튼 나는 조이는 것이 싫어 한겨울에도 목도리를 두르지 않는다. 하물며 허리에 라인이 들어가고 '작은 힙을 팽팽하게 잡아주는' 양복 따위래야. 


그러나 지금은 부득이하게 양복을 종종 입어야 하는 상황이므로, 갑갑함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체중 감량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하루키의 양복기피증이 부럽다. 

방금 자정이 지났다. 

늦었지만 달리기 하러 다녀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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