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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무제 3편

보름간 횡성에서 얻은 것들

by 한재우
보름 가까이 강원도 횡성에 와 있었다.


교육 훈련 차 온 것인데 회사 과제도 과제이거니와 채워야 할 다른 원고가 있어 자유로운 글을 도통 쓰지 못했다. 틈틈이 에세이를 끄적인 것도 3년이 넘어가니 별 것 아닌 글이지만 그래도 한 편 한 편을 매듭지을 때마다 일종의 상쾌함이 있는 것이 사실. 그래서 단 며칠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찔끔찔끔 물이 빠지는 세면대를 보듯이 갑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짬을 내어 달려들지 않고 2주 가까이 막힌 세면대로 살았으니 거 참 나의 게으름도 어지간한 일이다.


내일이면 이곳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소회라고까지 부르기는 부끄럽지만 그간 얻은 것을 짧게 세 가지만 적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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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 대청소를 할 때 일이었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를 이제 다음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하는 까닭에 마지막 날 대청소는 중요하다. 이불 빨래에, 화장실 청소에, 언덕배기만큼 쌓인 재활용품의 분리수거까지. 게다가 청소에 흥이 돋은 우리들은 유리창과 창틀까지 닦기로 했다. 아마 여름 내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창문일 것이다.


테라스와 통하는 커다란 거실 유리의 창틀을 닦고 있는데 창틀에 죽어있는 벌레가 무수히 많았다. 가로등조차 없는 새까만 산 속 한가운데다 보니 먼지는 별로. 대신 지저분한 가루들을 자세히 보면 대개 죽은 벌레였다.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대파 뿌리처럼 굵은 손가락을 이중창 사이에 낑낑대고 넣는데 창틀에 웬 나뭇잎도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스러진 갈색 나뭇잎. '가을도 아닌데 웬 낙엽 이람' 하며 녀석을 집어 들었는데, 이런.


죽은 나방이었다.


깜짝 놀라 에퉤퉤 하고 나방을 털어버렸다. 어찌나 큰지 날개가 오천 원짜리 지폐 반쪽은 넉넉히 덮을 정도다. 서울 근교에서 기껏해야 오백 원짜리 크기의 녀석들만 보아오던 나에게 강원도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


그런데 일단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고 나자 궁금증이 생겼다. 저렇게 큰 나방이 왜 창틀 사이에 죽어 있을까. 파운데이션을 덧칠한 듯한 나방 날개 특유의 윤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젓가락 끝만 살짝 대도 '바스락' 소리를 내며 흩어질 만큼 말라 비틀어진 것을 보니 죽은 지도 제법 되었나 보다. 저 큰 녀석이 어떻게 창틀 사이에 들어가 죽었을까.


유리창을 곰곰이 뜯어보다 답을 깨달았다.


숙소는 문자 그대로 산 속이라 밤이 되면 유리창 불빛을 향해 벌레들이 모여든다. 콘서트장에 모인 열성 팬마냥 빛줄기가 새어나오는 곳으로 다닥다닥 인 것이다. 저 녀석도 필시 그랬으리라. 거실 유리창 한 가운데에 왕처럼 날개를 드리우고 앉았겠지. 물론 저녁 나절 이야기다. 숙소 이용자들은 야행성이 아니므로 밤이 깊으면 불을 끄고 잤을 테니까.


문제는 소등한 이후다. 창문의 빛이 사라진 뒤에는 밤 사이 다른 곳으로 옮겼어야 한다. 아니, 적어도 아침해가 뜬 다음에는 태양을 피해 퍼덕 퍼덕 날아갔어야 한다. 우리 숙소의 거실은 해를 고스란히 받는 방향이니 말이다. 이 녀석은 그것을 하지 않았나 보다. 창문에 붙어 늦잠을 자다가 누군가가 환기를 시킨다며 아침에 거실문을 열었을 때 이중창 사이에 끼었던 게다. 그리고 햇살이 점점 강해지는 동안 옴쭉달싹하지 못한 채 괴로워했으리라.


햇살에 말라 죽었을 생각을 하니 그 고통이 가엽긴 했다. 하지만 죽은 나방을 집어 저 멀리 풀숲에 던지며 생각했다.


우리도, 나방처럼,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저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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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번 "#172 부지런히 읽고 꾸준히 쓰겠습니다"를 읽고 저 멀리 북유럽에서 연어를 구우며 아우가 말했다.


"그래. 길게도 써보고 짧게도 써보고, 하여튼 많이 써보우."


응응 그래야지, 하고 답을 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하니 '길게 쓰는 것'은 괜찮은데 오히려 '짧게 쓰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처음 시작할 때 대부분의 에세이가 일천자 안팎이던 것이 이제는 짧게 잡아도 3~4000자다. 그러다 보니 1천 자는 물론이고 2 천자쯤 되더라도 마치 절반만 끓인 라면처럼 뭔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언제든 햅쌀로 만든 튼실한 가래떡마냥 쭈욱쭉 길게 뽑을 수 있으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문제는 4천 자를 쓸 짬이 나지 않는 날은 '에이, 오늘은 어차피' 하는 심정으로 아예 글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소한 글감들은 10원 동전마냥 흐트러져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펜 없이 보낸 하루가 늘게 된다.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라고 '4천 자 이상은 나와주셔야 합니다' 하는 견적서를 들이밀며 글을 쓰느냐는 말이다. 한 푼을 건지기 위해 십리길도 마다하지 않는 장사꾼의 마인드로 부지런히 써야 할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마침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매주 2000자 칼럼을 쓰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중략) 신문 칼럼 쓰는 것이 직업이 되면 세상 모든 문제를 2000자에 맞추어 보게 된다. 그러면 칼럼 쓰기가 한결 편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다. 네모난 창으로 보면 하늘이 네모로 보이고 둥근 창으로 보면 둥글게 보이는 것처럼 2000자 칼럼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보면 그에 맞는 것만 보인다. 글 쓰는 호흡도 2000자에 맞추어진다. 더 짧게 쓰거나 더 길게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아차. 그랬구나. 내가 4천 자의 창문에 맞추어 세상을 보고 있었구나. 그보다 짧은 글감들은 아까운 줄 모르고 버리면서, 혹은 겨우 반 토막 라면을 불려 한 그릇으로 끓이면서 그저 대부분의 글이 4천 자로 늘어난 것만 보고 펜을 쥔 손에 힘이 붙었거니, 하고 좋아했구나.


문득 소설가 헤밍웨이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헤밍웨이가 친구와 점심을 먹던 중 내기를 제안했다.
"단지 여섯 단어만 써서 소설을 하나 쓸 수 있다는데 10달러를 걸지."


다른 이들은 그 내기를 받아들였고 테이블 위에 돈이 쌓였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냅킨 위에 다음과 같이 끄적였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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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동안 머문 이 숙소는 '낙석주의' 표지판이 드문드문 서 있는 도로에 붙어 있다. 즉, 경사가 상당한 길의 바로 옆이라는 이야기다. 도로에 접어들면 오른쪽으로는 오르막이요, 왼쪽으로는 내리막. 비탈은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지라 내려오는 차들은 쌩하고 달리고 올라가는 차들은 저속 기어로 엉금엉금 이다.


그러다 보니 가장 불편한 것은 달리기 할 루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산에는 뱀이 나오니 들어갈 수 없고, 집 앞은 비포장도로라 뛸 수가 없으며, 오르막은 유산소보다는 하체 근력 운동에 가깝고, 내리막은 무릎 관절 걱정에 달리기가 어려웠다. 이런 것이 사면초가 고립무원인가. 어느 방향 하나 마음 놓고 질주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런 불편에도 불구하고 엉금엉금 오르락 내리락하며 땀을 흘리기는 했으되, 그러는 동안 한 가지를 결심했다. 신림동에 돌아가면 다시는 운동할 곳 없다고 투덜대지 않으리라. 집 앞은 개천이요, 집 뒤는 마을 공원이라 뛰자고 하면 뛸 곳이 천지다. 우레탄으로 포장된 길이 지하철 2호선을 따라 저녁 내내 달려도 다 못 밟은 만큼 길쭉길쭉하니, 마음만 먹으면 운동을 못할쏘냐. 목 늘어진 싸구려 티셔츠에 색 바랜 뉴발란스 운동화 한 켤레면 얼마든지 모세혈관 전체를 대청소한 듯 가뿐한 몸이 될 수 있다.


하여 내일 집에 도착하는 즉시 당장 신발끈을 묶고 나가야겠다. 운동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 역시 여섯 단어로 다음과 같이 답하리라.


"Shoes. A level road. Nothing el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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