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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독서가 공부다 _ 1

그중에 남달랐던 학생이 있었다

by 한재우
"오직 독서 한 가지 일이, 위로는 옛 성현을 좇아 함께할 수 있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길이 깨우칠 수 있게 하며, 신명에 통달하게 하고 나라의 정사를 도울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과 벌레의 부류를 벗어나 저 광대한 우주를 지탱하게 만드니, 독서야말로 우리들의 본분이라 하겠다." -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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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졸업반 때 일이다.


나는 '인문학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애당초 '글쓰기'를 공부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 즈음 새로 도입된 '말하기' 수업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더랬다. 수강신청이 시작되면 1~2분 안에 마감이 완료될 정도였으니까. 나 역시 '말하기' 수업에 청약을 넣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다렸지만, '혹시나'는 역시나. 서버 접속 폭증으로 가뜩이나 느릿느릿한 수강 신청 사이트에 겨우겨우 로그인했을 때 '말하기' 수업 옆에는 이미 '마감 완료'라는 빨간 글씨가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비슷한 수업이 뭐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고 그러다가 덜컥 '인문학 글쓰기' 수업에 올라탔다. 지금 이렇게 펜을 끄적이는 일에 큰 재미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면 우연히 들은 '글쓰기' 수업이 감사할 따름이다. 삶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선물을 주기도 한다.


아무튼, 그 '인문학 글쓰기' 수업은 일반적인 작문 수업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반적인 작문 수업'이 어떤 모습이냐고? 혹시 서점에 들를 일이 있으시거든 요즘 넘실대는 글쓰기 관련 서적들을 조간신문 넘기듯 휘휘 뒤적여보시라. 글감 찾기, 개요 짜기, 문장 쓰기 등등. 마치 근육 이름이나 소화기관의 작동 원리부터 빽빽하게 늘어놓은 '헬스 트레이닝 교본'을 보는 것 같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쓸모 있음을 경험하기 전에 흥미를 잃고 '나, 안 해'라고 나자빠지기 쉽다는 뜻일 뿐이다.


'인문학 글쓰기' 수업은 달랐다.


첫째, 모두 글을 쓴다.

둘째, 다른 사람의 글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셋째, 고쳐 쓴다.


이렇게 세 단계로 반복하여 진행되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매 시간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는 수업이었다. 학생들의 학년과(갓 교복을 벗은 새내기부터 졸업반 늙은이까지), 전공이(공업 수학책을 든 공대생부터 바이올린을 멘 음대생까지) 다양한 까닭에, 글감도 입장도 취향도 무지개처럼 사람마다 색색가지로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모든 사람의 글을 읽고 모든 사람이 토론하는 진행 방식에서 정말로 다채로운 글들을 접했다.


그중에 남달랐던 학생이 한 명 있었다. 생각이 깊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서 아는 것이 많았다. 수십 명의 서로 다른 전공자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쓴 글들을 발표하는 자리였기에 일면식도 없는 주제가 나오면 몇몇 학생들은 음소거된 라디오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질문하고 답하고 의견을 개진하려면 그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사전 지식이 있어야 가능했던 까닭이었다. 한 학기 내내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으니 지식과 사고의 폭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수업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남달랐던 학생은 대부분의 수강생과는 확실히 달랐다. 늘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했고 모든 학생들과 깊이 있는 문답을 주고받았다. 군계일학. 공부로는 내로라하는 사람들만 모인 서울대의 교양 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친구였다.


학기가 끝나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당시는 싸이월드라고 개인 홈페이지를 제공하는 SNS가 대 유행이었다. 싸이월드 '미니 홈피'를 들어가면 그 사람의 일상과 관심사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싸이월드 일촌을 맺었고, 학교를 졸업했으며, 각자의 길을 갔다.


1년 여가 지난 뒤였다. 문득 생각이나서 그 친구의 미니 홈피를 들어가보았다.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했다. 나는 게시판 여기저기를 눌러보다가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그의 '독서 결산'이었다.


그는 연말이 되면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추려 분야별로 나누고 나름의 코멘트를 달고 있었다. 학교 중앙도서관의 대출 목록과 인터넷 서점의 구매 내역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코멘트는 대충 이러했다. "올해는 과학 분야의 독서량이 적었고 경영 서적이 두드러지게 많았다. 시(詩)집이 한 권도 없었으니 시간에 쫓겨 바쁘게 산 탓인 듯. 내년에는 보완할 필요 있음."


그 꼼꼼함보다 놀라운 것은 책의 권 수였다. 그 해에 그가 읽은 책은 80권. 몇 시간이면 읽어치울 수 있는 가벼운 책들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한창 취업 준비에 바쁜 졸업반. 전공 공부를 하고, 졸업 논문을 쓰고, 구직 원서를 내는 동시에 읽은 책이었다. 그 전 해에도, 또 그 전 해에도. 대략 80권 정도의 책이 결산의 대상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랬구나. 그 친구가 수업 때 달랐던 이유는 엄청난 독서력 때문이었구나. 폭넓은 지식과 깊은 사고력을 가지고 학점이 좋지 않을 수는 없다. 그 정도 내공을 갖춘 이가 자기 소개서를 못 쓰거나 면접을 망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는 열정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름난 어느 대기업에 입사해 있었다.


역시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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