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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Sep 30. 2015

#115 한 숟가락 더. 치명적.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그 단순한 싸움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의 식습관 중에는 '무한반복 섭취로 빠져드는 지옥의 현관문'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먹으면, 다른 것이 먹고 싶어 지고, 그 다른 것을 먹으면 다시 아까 먹은 것이 먹고 싶어 진다. 닭이 알을 낳고, 알에서 닭이 나오는 것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식탐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 현관문을 여는 도어키의 비밀번호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흰 쌀밥과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이상하게 냉장고에서 그대로 꺼낸, 익히지 않은 비엔나 소시지가 좋다. 십자 모양 칼집을 내서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살짝 볶아 문어발처럼 만드는 것도 물론 좋아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차가운 소시지도 이렇게 맛있는걸. 다행히 비엔나 소시지에는 "비가열 제품이므로 반드시 조리 후에 드십시오." 하는 경고문이 없다. 비싼 소시지 중에서 어떤 것은 반드시 비닐을 벗기고 먹어야 하는 것도 있는데, 비엔나 소시지는 기본적으로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니 그것 또한 감사한 일이다. 


아무튼 소시지 한 개를 집어 우물우물 씹다 보면 문득 흰 쌀밥이 한 숟가락 먹고 싶어 진다. 우리 집 전기밥솥에는 거의 늘 밥이 있는 편이기 때문에 주저 없이 숟가락을 꺼내 포클레인으로 흙을 뜨듯 '푹' 하고 밥을 퍼 입에 넣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한 입 가득 쌀밥을 우적거리 노라면 다시 짭짤한 소시지가 먹고 끌린다. 


흰 밥이 싱겁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소시지를 한 개 꺼내면, 그 다음에는 또 밥 한 숟갈이 생각나고, 예외 없이 다시 소시지로 이어진다. '한 숟가락 더' 그리고 '한 개만 더'. 무한반복 섭취의 지옥문이란 이런 것이다. 밥은 소시지를 부르고 소시지는 밥을 부르며, 다시 밥이 소시지를 부르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상이다. 


지옥의 문이 닫히려면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충분히 배가 불러서 더 먹기 괴롭거나, 비엔나 소시지를 다 먹어치우거나. 지금까지 수차례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 외의 바람직한 길, 예를 들어 적당히 소시지  한두 개 쯤으로 만족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된 기억이 없다. 결국 참사를 사전에 방지하려면 아예 비엔나 소시지를 먹지 않던지, 아니면  200g짜리 제일 작은 소시지를 사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뿐이다. 


'한 숟가락 더'의 유혹은 이렇게 강력하다. 의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 숟가락 더'는 한반도를 강타하는 초대형 태풍처럼 순식간에 체중계의 숫자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린다. 



어제는 자정 넘어 달리기를 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집 앞의 도림천변에서 출발해 신대방역 부근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GPS 기록을 보니 달린 거리가 거의 5km 가까이 된다고 나왔다. '조금 더 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저 앞의 재래시장까지만 다녀오면 6km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덥고, 숨이 차고, 빨리 멈추고 싶었다. 결국 추첨 중인 로또 복권 번호를 확인하듯 GPS의 숫자를 뚫어지게 보며 달리다가 4.98km, 4.99km를 지나 5.00km가 되는 순간, 수능시험을 치르자마자 펜을 놓은 수험생처럼, 딱 멈추어버렸다. '조금만  더'라는 의지는 목표 달성 앞에서 완전히 무력했다.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은 "어떻게 연습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조금만 더'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녀는 매일 아침 20분 간 제자리 점프를 한다. 20분이면 횟수로 2000번 정도의 점프라고. 그런데 그 연습이 얼마나 힘든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온몸이 부서지는 듯, 목이 타들어가는 듯 고통스럽다. 하지만 강수진은 죽을 힘을 쥐어짜 '조금만 더'를 해낸다. 마침내 목표로 세웠던 20분을 넘어 21분이 되는 순간,  온몸으로 버텨낸 그 1분이 온 우주를 자신감과 성취감으로 뒤덮는다. 그것이 매일 아침 강수진이 스스로와 치르는 싸움이며, 그녀를 '강수진'으로 만든 비결이라 했다. 


'한 숟가락 더'를 이겨내고 '조금만 더' 버텨내는 것.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싸움이란 그런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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