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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Sep 30. 2015

#117 맥주, 맥주, 맥주

운동을 마치고 난 뒤 벌컥벌컥 그 느낌이란

달리기를 할 때 두 번째로 많이 떠오르는 말은 "맥주"다. 


첫 번째는 물론 "그만 뛰고 싶다."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 생각을 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 '그만 뛸까? 그만 뛸까?' 하고 자꾸 생각하면 어느 순간 끈이 '탁' 끊어진 인형처럼 멈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맥주, 맥주' 하는 동안에는 다리를 멈추는 일은 없다. 


내가 달리는 도림천 변에는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밤 아홉시나 열시. 가볍게 맥주를 꼴깍꼴깍하기 딱 좋은 시간이다. 무엇보다 여름아닌가.  여름하면 맥주, 맥주하면 여름이다. 좁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느니 바람이 살살 불어오는 개천이라도 나가는 편이 확실히 나은 것이다. 벤치에 걸터앉아 수다도 떨고, 산책 나온 강아지들도 구경하고, 맥주에 새우깡이라도 오물오물 할 수 있다. 개천의 바위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앉아있는 품이 마치 바닷가 방파제에 달라붙은 따개비들 같다. 도림천의 따개비들은 여기저기 무리지어 은빛 캔에 담긴 여름 밤을 마신다. 


나는 원래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7년 산 위스키든, 빨간 뚜껑의 쐬주든, '이건 술이 아니라 숫제 보약'이라는 알수없는 중국 술이든 간에, '맛있다'는 생각이 드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 금가루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노란 술도 그저 그랬고, 가짜 방지 홀로그램이 반짝반짝거리는 비싼 양주들도 끌리지 않았다. 


자리 탓에 마셔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거의 입에 대지 않는 사람이 나다. "술 잘 하나?" 라고 누가 물을 때마다 시선을 15도 정도 떨구면서 멋쩍은 듯 "아니 별로입니다." 하고 대답해 왔다. 무엇이든 잘 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술 또한 예외는 아니며, 특히 사회 생활을 위해서 '남자라면 배워야' 하는 것이 술이라는 말은 꽤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른 해 넘게 살면서 한결같이 '별로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도 고집이 세긴 세다. 어쨌거나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는 뭐 그럭저럭 '이슬 양' 이나 '처음 양'과 친하지 않은 채로도 밥벌이는 하며 살고 있다. 



그런 내게 있어 유일한 예외는 바로 맥주다. 


맥주가 나의 철옹성 같던 알콜방어선을 무너뜨린 것은 순전히 운동 때문이었다. 스물 두살부터 시작한 검도에 제대로 포옥 빠진 것은 20대 중반. 수험생으로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검도였다. '규칙적인 운동은 또 하나의 시험 과목'이라는 멋진 고시 격언도 도장을 향하는 발걸음을 당당하게 만들었다. 월화수목금. 일주일에 닷새나 죽도를 휘둘렀다. 체력의 절정기였다. '규칙적인 운동'이 은유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시험 과목이었다면 수석합격을 노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때 운동을 마치고 사람들을 따라 맥주를 마셨다. "더운데 한 잔씩들?"하는 말에 우리는 도장 근처의 호프집으로 욕조 구멍에 물이 빨리듯 들어갔다. 냉동실에서 꺼낸 500ml 잔은 살얼음으로 하얗게 빛났다. 갓 내온 3000cc 생맥주를 꼴꼴꼴 잔에 채우면 황금빛 맥주 위에 크림처럼 하얀 거품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맥주 잔의 두툼한 손잡이를 바이킹마냥 움켜쥐고, 맥주를 목구멍 안으로 쭈우욱 쏟아 부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서리가 서렸다. 


행복했다. 


그 때 이후로 '운동 이후 맥주 한 잔'은 일종의 행복 공식이 되었다. 밤에도 할 일이 있는 탓에 매일 공식대로 살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꼭 그렇게 되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음이 바로 이랬겠지. 하루키도 유명한 맥주 마니아다. 


“42km를 다 뛰고 난 뒤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는 맥주 맛이란 그야말로 최고다. 이 맛을 능가할 만큼 맛있는 것을 나는 달리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대개 마지막 5km 정도는 ‘맥주, 맥주’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달리게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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