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다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는지 묻는 친구들에게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공부는 얼마나 공부하느냐 못지 않게 얼마나 잊어버리지 않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 맞다. 진실로 그렇다. 영어 단어 100개를 던져주고 다 외울 때까지 방문 밖으로 못나가게 엄포를 놓으면, 머리에 쥐가 나더라도 외울 수는 있다. 단지, "다 외웠다!" 하고 신나서 포르르 뛰어나가는 순간, 억지로 머리 속에 우겨넣은 것들이 포르르 사라지고 말아서 그렇지.
읽어야 하는('읽는다'고 쓰지만 '이해하도록 노력한다'와 '암기하려고 애쓴다'라고 읽어야 바람직한 학생의 자세다)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기 시작하는 대학 생활 이후로는 '잊지 않음'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를테면 법학의 기본과목은 헌법, 민법, 형법이다. 줄여서 부르기를 헌민형. 그런데 이 헌민형의 교과서를 한 권씩만 골라도 대략 5000페이지 안팎이다. 틈틈이 뒤적거려야 하는 법전과 참고해야 하는 판례집은 제외하고도 그렇다. 하루에 10시간 정도 꼬박 도서관을 지켜서 100페이지쯤을 '읽는다'고 할 때 세 권을 읽는데만 두 달이 걸린다. 이 말인 즉슨, 오늘 공부한 부분을 다시 펴는 것은 앞으로 두 달 뒤가 된다는 뜻이다. 해보면 안다. 두 달 뒤에 펴면, 교과서가 마치 소개팅 자리처럼 낯설다. 완전히 깨끗하다.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어떤 사람들은 한심한 기억력을 한탄하며 자신의 둔한 머리를 원망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타임루프에 갖힌 영화 주인공처럼 불안해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다시 읽는다고 외워질까.' 불안이 쌓이면 좌절이 되고, 좌절이 잦아지면 포기가 찾아온다. 내가 그랬다.
멋진 비유가 하나 있다. 공부를 하는 것은 마치 여러 개의 접시를 막대기 위에 얹어서 돌리는 것과 같다. 수학도 돌리고, 영어도 돌리고, 유기화학이나 생물도 돌리고. 그런데 서투른 사람들은 새 접시를 꺼내 돌리는 것에 집중한다. 반면에 능숙한 사람들은 돌아가고 있는 기존의 접시들을 계속 돌게 하는데 주력한다. 회전력이 떨어지는 접시들을 툭툭 쳐서 한 개도 잃지 않으면서, 여유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새 접시를 추가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은 흐느적거리는 접시에 눈길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막대를 건드려 와장창 무너뜨리기까지 한다. 애써 공부한 것을 잔뜩 꾸겨서 휴지통에 집어던진다는 말이다. 공부를 마친 직후에 달려가는 텔레비전(와하하하! 재밌다!), 만화책(집중과 몰입), 이런저런 게임(그 사이 랭킹에서 밀렸군)들이 그것이다.
공부는 상당히 힘든 일인 반면, 이런 것들은 즐겁고 자극적이다. 우리 뇌는 컴퓨터와 비슷해서 처리할 수 있는 작업량에 한계가 있다. 공부한 내용이 대뇌피질의 해마에 제대로 들러붙기 전에 강렬한 자극이 치고 들어오면, 이제 막 머리 속에 겨우 매달린 지식들은 손을 놓고 우수수 떨어져나간다. "끝났다!" 하고 신이 나서 의자를 박차는 사람은, 공부한 내용을 발로 뻥 차는 것과 같다. 애써 끙끙댄 시간이 무의미해진다.
'얼만큼 공부하느냐보다 얼만큼 잊어버리지 않느냐'가 중요한 이런 원리는 삶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된다. 부자가 되는 기본은 버는 것보다 적게 쓰는데 있다. 열 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무너지는 것이 신뢰다. 요컨대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다.
다이어트 역시 마찬가지. '살 빼야되는데' 소리를 평생했음에도 내가 요모양 요꼴인 것은 줄인 만큼 먹어 대고, 나아간 만큼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체중감량에 성공하려면 어제보다 찌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아야 에이스라고 부를 수 있다. 전진의 기본은 불퇴전(不退轉), 적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