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삶을 사랑하고 있을까
오늘 박찬호 선수의 은퇴식이 있었다.
야구 생활의 마지막은 고국에서 하고 싶다며 한화로 돌아왔던 박찬호다. 2012년의 커리어를 마지막으로 마운드에서 영원히 내려갔던 그였다. 그의 정식 은퇴식이, 공을 놓은지 20개월이 지난 오늘 열렸다.
박찬호는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던졌다. 자유롭게 흩날리는 파마머리를 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포구는 김경문 감독. 박찬호 선수가 평상시 존경하는 선배라 특별히 부탁한 것이라 했다. 그는 공을 뿌렸고, 김경문 감독의 미트 속으로 정확히 들어갔다. 아마 오른손 타자가 서 있었다면 안쪽으로 꽉 찬 스트라이크가 되었을 것이다.
후배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와 헹가레를 쳤고, 한화의 몇몇 선수들은 기억에 남을만한 선물을 준비했으며, 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박찬호'를 연호했다. 그럴만한 선수였다. 마땅히 그래야 할 선수였다.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자격이 있는 훌륭한 야구선수임과 동시에 한 명의 훌륭한 영웅이었다.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의 소유자. 우리나라 최초로 메이저리거로 직행한 선수. 2000년 18승을 포함하여 5년 연속 두 자리 승수. LA다저스의 1선발로서 올스타 선정, 사이영상 후보 선정. 아시아인 최다 124승의 기록. 그러나 이 모든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활약하던 시기가 IMF로 힘들던 1998년 즈음이었다는 사실이다. 박찬호 선수의 공 하나 하나가 우리 나라를 위로했다. 단군이래 최고의 경제난이라 불리던 IMF의 참담한 시절을 국민들은 코리안특급 박찬호를 보며 버텨내고, 희망을 품었다.
그런 박찬호가 오늘 은퇴식을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그는 울먹였다. 자신에게 야구장은 학교나 마찬가지였고, 야구는 하나의 과목이었다고. 그 과목에서 인생을 배우고,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어서 고맙노라고, 박찬호는 말했다. 그를 떠나보내며 하늘도 감동에 젖은듯 가는 비를 뿌렸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물었다. 한화에서 은퇴하고 20개월 동안 무얼하며 지냈느냐고. 박찬호는 답했다.
"20개월 간 계속 훈련을 쉬지 않았다. 혹시나 다시 불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서 몸을 만들어왔다."
박찬호의 그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그토록 야구가 좋았던 것이다. 30년 동안 야구를 하고도, 최고의 영광을 모두 누리고도, 공 하나가 더 던지고 싶어서, 혹시 팀이 어려워지면 어떤 보직이 되었던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똑같이 훈련을 했다.
20개월 동안. 그것도 혼자서.
시험을 치르고 나면 책을 집어던지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졸업을 하고 나면 교과서를 내다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터를 나서고 나면 해야 할 일 따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부를, 우리의 일을, 우리의 인생을 박찬호만큼 사랑하며 살고 있을까.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모든 것을 바치고도 한 번만 더 해보고 싶다고 고된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부상이 아니었으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액의 연봉을 받고도 제 역할을 못해준다며 '최악의 FA계약'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재기를 위해 머리를 삭발하고 벤치의 구석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런 어려움을 고스란히 겪었다. 그리고 스스로와 싸워 이겨냈다. 결국 전성기 때의 실력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인생에는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며, 그런 중에도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함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야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박찬호가 야구를 사랑하듯, 내가 할 일을 사랑하고 있을까.
내가 가고 싶은 길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밤이다.
고맙습니다.
61번. 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