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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14 입영 전야

나는 입대 전날 무엇을 했던가

헤어샵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은 밤 10시를 겨우 15분 남긴 시각이었다. 


오늘은 원래 퇴근 후에 머리를 자르려 했었다. 여차여차 하다보니 퇴근이 늦었던 것 뿐이다. 이 시간인데 혹시,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머리를 깎는 손님이 있었다.


"저기, 지금도 되나요?"라고 묻자 공기가 냉랭했다. 잘못 들어왔나, 하는 찰나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면서 반색을 했다.

"아이구 그럼요. 이쪽으로 가방 두세요."


지정한 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디자이너 한 명이 가운을 들고 내 등 뒤로 왔다. 표정이 영 즐겁지 않다. 짐작컨대 아무래도 이미 퇴근 시간을 지났거나, 아니면 퇴근 시간이 임박한(아마 10시?) 모양인듯 싶었다. 헤어샵도 직장인데 왜 아니 그렇겠나. 슬슬 가위나 수건을 정리하면서 퇴근을 준비해야할 찰나에 머리를 깎고 싶다고 삶은 시레기나물처럼 축 늘어진 남자가 들어오다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다. 종업원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나도 십분 마찬가지. 하지만 나로서는 내 머리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하기위해 좋게 좋게 머리를 깎는 수 밖에 없다. 나는 새로 이사온 이웃이 시루떡을 돌리듯 이런 저런 말을 반갑게 붙였다.


몇 달 전에 여기서 염색과 파마를 같이 했는데요. 
제 머리가 좀 손상된 편인가요. 
염색과 파마 중에서 어떤 게 더 모발에 안좋아요. 
두 달 전쯤 기장으로 해주시되 숱이 많은 편이니 씨언하게 부탁드릴께요.



9시 50분. 말을 섞다 보니 디자이너도 인상이 풀렸다. 숱을 치는 가위질이 재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염색과 파마를 동시에 하면 머리카락이 크게 다치니 일주일이나 열흘쯤 간격을 두고 하는 것이 좋다는 유용한 조언을 take it. 안그래도 조만간 염색을 다시 하려 한다고 나 역시 화답을 give it. 어차피 마지막 손님인 거 기분 좋게 마무리하자고 마음을 순하게 먹은 것 같았다.


그 때였다. 헤어샵 문을 왈칵 열어젖히며 까르르대는 서너명의 학생들이 와르르 들어왔다. 

까르르-와르르 학생들은 남자와 여자가 섞여 있었다. 산책하는 칸트처럼 조용하던 가게가 갑자기 시끌벅적 해졌다.


"얘 머리 짤라주세요!" 여학생 소리. 
"젠장. 아 젠장!" 남학생의 절규. 
"가만있어 임마" 다른 남학생의 윽박지름.
디자이너들은 손을 멈추고 일제히 그 쪽을 쳐다보았다.


"얘 내일 군대 들어간대요!"



아. 군입대. 


내 디자이너가 피식 웃었다. 머리 위의 가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디자이너가 그 학생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나 보다. 바리깡의 인정사정없는 기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초기라도 돌리는 듯 큼지막한 모터 소리. 함께 온 친구들은 이 녀석 뒤통수에 하트를 그려달라는 둥, 우리 이름을 머리에 써달라는 둥, 길다란 머리가 볏단처럼 툭툭 잘려나가는 내내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저 녀석은 군입대 전날인데 친구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구만.



나는 입대하기 전에 어디서 머리를 잘랐던가 떠올려봤다. 스물 아홉. 그 때도 신림동에 살았으니 이 부근 어디서 잘랐을텐데 기억에 전혀 없다. 내게 있어 입영전야의 삭발은 그렇게 인상적인 이벤트가 아니었나보다. 게다가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짧은 스포츠와 3mm 삭발을 반복했었다. 덕분에 입대전 삭발 때도 심리적인 충격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나는 입대 전날 무엇을 했던가. 나는 7월 13일 논산으로 입대하는 장정이었다. 그해 7월 13일은 월요일. 7월 11일과 12일 양일간 올림픽공원에서 검도 시합이 있었다. 어차피 군에 갈 몸이라 할 일도 특별히 없었던 나는 토요일 개인전과 일요일 단체전을 모두 출전했었다. 아쉽게도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던 경기. 일요일 시합이 끝나고 검도장 사람들은 1인분에 3300원하는 싸구려 고기집에서 회식을 했다. 나는 수입산 냉동 삼겹살을 구우면서 사람들에게 '내일 입대하노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내일 군대가는 사람이 여기서 주말 내내 검도 시합 나가도 되느냐고 누군가 놀랐던 것 같다. 입대 전날에는 원래 토하도록 술을 먹고 들어가는 거라며 소주를 강권하던 얼굴도 떠오른다. 나는 별일 아닌듯 씨익 웃으며 평소의 회식처럼, 넉넉히 먹고 적게 마셨다. 고기는 꽤나 질겼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출력해놓은 프린트물을 읽었다. 인터넷 언론 매체에서 연재되던 대담 연재 기사를 묶은 것이었다. 수십장이나 되었다.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휴가에 나와서 그 대담집이 <종교 전쟁>이라는 책으로 출간된 것을 알았다.


어차피 제대하고 나면 종교학과 관련한 대학원에 진학하리라 마음먹고 고시를 그만둔 거라 당연한 일이었다. 스무살 청년들에게는 군대가 영원처럼 길게 보일테지만, 서른해 가까이 살아온 수험생 아저씨에게 2년이란, 그저 법서를 몇 회독하고 핸드폰을 두어번 정지시켰다 풀면 지나가는, 그런 익숙한 시간이다. 나는 2년이란 시간을 마치 하루 밤처럼 짧게 여기려 했다. 밤새 <종교 전쟁>을 읽다가, 다 못읽은 페이지를 책상 위에 펼쳐둔 채 집을 나서면, 2년 뒤에 돌아와 아무일 없었던 듯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읽어나가는 식으로, 그런 모습으로 군대를 다녀오고 싶었다.


그래서 입영 전날 정말로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논산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조차 프린트물을 열심히 읽었다. 에어컨이 굉음을 질러대는 입소대대 인근 식당에서 숭늉처럼 희여멀건 설렁탕에 공기밥을 절반쯤 말아 먹으면서도 나는 손에서 프린트를 놓지 않았었다. 무언가에 쫓기듯 글자를 남김없이 빨아먹다가 입소 장정들은 어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서야 거기서 눈을 떼었다. 하루밤 사이에 그 한 권을 나는 거의 다 읽었더랬다. 입대라기 보다는 기말고사 시험 전날 벼락치기를 하는 학생같았다.


내 20대의 마지막 자유 시간은 그런 모습이었다. 

모르겠다. 그것이 입대라는 현실을 잊기 위해 내가 발악했던 방식이었는지도.


헤어디자이너는 기장이 괜찮으시냐면서 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그정도면 됐다고 말했다. 몇시까지 일하시냐고 물으니, 오늘은 10시까지란다. 시계를 보니 이미 열시가 조금 지났다. "저때문에 늦으셨네요." 라고 미안함을 표했다. 그도 '아닙니다' 라고 웃으며 머리를 샴푸해주었다. 두피를 꾹꾹 눌러주는 손길이 속이 꽉찬 알밤처럼 단단했다.


삭발을 마친 입영 전야 친구가 내 옆 샴푸대에 눕는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아무 탈 없이 2년을 보내고 나오기를 나즈막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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