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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15 토실토실한 식빵

썰지 않은 식빵을  좋아하세요?

우리 집 앞 버스 정류장에는 제법 오래된 빵집이 있다. 


그렇다고 유명한 집이라거나 전통의 힘이 느껴지는 대단한 빵집이란 말은 아니다. 그냥 그럭저럭 제법 오래된 동네 빵집. 그나마 오래 되었다는 사실도 얼마전에 바꾼 가게 간판을 보고 알았다. Since 1979. 나에게 형 뻘인 가게다. 크라운베이커리에서 파리바게트, 베이커리 카페에 이르기까지 기관총처럼 이어지는 프랜차이즈의 공세에 대부분의 빵집들이 진작에 고사한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잘 버틴 가게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가게다. 전통있는 개인 가게들은 보통 튀김 소보루라던지, 진격의 단팥빵이라던지, "와, 거기는 뭐가 있대" 하는 스페셜한 아이템이 있어 살아남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은 도통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가게 밖의 X-배너에는 '슈크림, 고로케' 가 써있긴 하지만 먹어봐도 그저 그런 정도. 널리고 널린 프랜차이즈 빵집보다 맛있는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몇 백원 싸긴 하지만 말이다.


메뉴 구성도 평범하다 못해 단촐하다. 20년 전 동네 빵집이 개발 금지 구역으로 묶여 그대로 보존된 느낌이랄까. 크림빵. 단팥빵. 소라빵. 소보루빵... 케이크도 마찬가지. 생크림 케이크가 나오기 전,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 결혼식 때 잘랐을 법한 일반 크림 케이크가 지금도 쇼케이스에 앉아 있다. 하얀 바탕에 분홍색 데코를 얹은, 촌스러운 케익. 하기야 파리바게트만 보아온 요즘 아이들이 보면 오히려 '저 복고풍 케이크는 도대체 무슨 맛일까.' 하고 궁금해할 수는 있겠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계산이 안나오는 빵집이라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나는 종종 그 집을 간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어서 오세요. 파리바게트 입니다~"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파리바게트 cafe~"도 있음을 생각할 때, 무작위로 찾을 빈도 보다는 분명 자주 가는 것이 분명하다.


빵이 맛있어서가 아니다. 크림, 소라, 고로케를 한 개씩 먹어보고는 다시 산 적이 없다. 복고풍 케이크를 구매할 리도 만무. 나는 20년 전의 촌스러운 케이크를 궁금해할 만큼 어리지는 않다. 이유는 딱 하나다. 


이 빵집은 식빵을 썰지 않고 준다는 것.


퇴근길에 보면 식빵들이 차고지에 들어간 버스처럼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것이 통유리창으로 환하게 보인다. 우유 식빵, 옥수수 식빵, 그리고 밤 식빵. 도로 쪽을 향해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드러낸 식빵들을 보면 귀퉁이를 쥐고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싶어진다. 


성격이 모난 탓이려나. 나는 귀퉁이만 보면 사족을 못쓰는 사악한 습성이 있다. 갓 쪄낸 두부 한 모를 사오다가도 귀퉁이를 베어먹고, 벽돌 모양 버터를 개봉해도 귀퉁이부터 잘라먹는다. 그런 내가 노릇노릇 식빵 귀퉁이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자석처럼 이끌려 가게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식빵들 중에서 한 덩어리를 척 집어들고 지갑을 꺼낸다.


"잘라드릴까요?" 
주인 아저씨는 늘 묻는다.


그럴리가. 


아니요. 그냥 주세요.


썰지 않은 식빵을 팔기에 여기서 사는 거라는 이야기는 구태여 하지 않는다. 
거친 상남자처럼 그저 말없이 식빵 덩어리를 옆구리에 끼고 그 자리를 떠날 뿐.



어제는 간만에 옥수수 식빵을 집었다. 자르지 않은 덩어리째 식빵이 푸들처럼 얌전히 가슴팍에 안겨 있었다. 품 안에서 빵 내음이 솔솔 올라왔다. 몇 발자국 앞에 아가씨 둘이 걷고 있었다. 뭐가 좋은지 자기들끼리 재깔재깔 떠들어대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늙은 가로등이 띄엄띄엄 서 있는 피곤한 골목길이었다. 나는 빵 봉투 안에 손을 넣어 귀퉁이를 떼어냈다. 적당하게 단단한 옥수수 식빵의 껍데기 안으로 폭신한 속이 느껴졌다. 나는 빵 조각을 우물우물 씹었다. 다리가 무겁도록 방전된 퇴근 길이 빵조각 하나 덕에 조금 행복해졌다.


한 조각 떼어 맛만 보려했던 것인데, 일단 맛을 한 번 보니 도저히 맛만 보고 멈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가파른 언덕 위에 있었다. '느릿느릿 걸어올라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하지' 나는 식빵의 4분의 1쯤 되는, 큰 덩어리를 쭈욱 떼어냈다. 손바닥 가득 쥔 빵 덩어리는 끝내주게 예뻤다.


"아까 거기 다시갈까?" "그럴까?"


그 순간 앞서 걷던 아가씨 둘이 뒤를 돌았다. 갑작스런 일이었다.


둘은 나와 나의 빵을 보더니 흠칫 멈췄다. 
재깔거리던 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나는 오른팔로 빵을 안고 왼손으로 빵조각을 든 채, 표정없이 그 둘의 옆을 스쳐 걸었다. 
뚜벅. 뚜벅. 뚜벅.


두 발이 젖은 밀가루 포대를 묶어맨 듯 무거웠다. 
나는 뜯어놓은 빵 덩어리를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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