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아는 이야기지만 그리스 신화의 주신(主神) 제우스는 지독한 바람둥이였다.
신이든, 님프든, 인간이든 그 상대를 가리지 않았던 제우스는, 틈나는 대로 한 눈에 반하고, 변신술을 활용한 각양각색의 매력을 발휘하여, 부지런히도 사랑을 나눴다. 신화에서 그와 관계를 맺은 여인들의 리스트는 쉬지 않고 한 숨에 읽기 힘들 만큼 길다. 이미 아내 헤라가 있었던 까닭에 이 모든 인연이 분명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불륜임은 명백하지만, 어쨌거나 무수한 어려움들을 제우스는 창의적인 방법으로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를테면 그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도록 청동 탑에 가둔 다나에를 황금 소나기가 되어 찾아갔고, 꽃을 따러 나온 에우로페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하고자 하얀 소로 변해 다가갔으며, 처녀신 아르테미스를 모시는 까닭에 독신주의자였던 칼리스토에게는 바로 그 '아르테미스'로 모습을 바꾸어 구애했던 것이다. 참 열심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우스의 바람기를 응징하는 헤라의 복수도 보통은 아니었다. 불륜의 상대를 미물로 바꾸는 벌을 내렸다던가 그저 죽여버리려 했다는 정도의 심플한 복수들은 제쳐두자.
인간인 세멜레가 제우스와 밀회를 즐긴다는 사실을 눈치챈 헤라는 세멜레를 꼬드겨 '자신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본 모습을 보여달라'고 제우스에게 조르게 만든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요청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가 어찌될 지 뻔히 알았지만 말이다. 인간이었던 세멜레는 신의 광채를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번개에 타죽었다.
조금 더 끈질긴 복수는 암소로 변한 불륜의 상대 이오였다. 헤라는 제우스에게 암소 이오를 달라고 청한 뒤 눈이 100개 달린 아르고스에게 감시를 붙였다. 후에 이오가 도망치자 헤라는 쇠파리 떼를 보내 괴롭히는데, 쇠파리 떼에게 쫓긴 이오는 그리스를 가로질러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을 건넜다가 소아시아로 돌아와 마침내 이집트 땅에 도달해서야 겨우 헤라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영원히 엉덩이와 등짝을 무는 쇠파리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헤라표 복수의 상징은 저 유명한 헤라클레스였다. 제우스는 인간 세상을 위해 크게 쓰일 영웅을 한 명 낳기 위해 인간인 알크메네와 동침하고는 그 아들의 이름을 헤라클레스라고 붙였다. 헤라클레스라는 말은 '헤라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의미로서, 마치 잔뜩 술을 마시고 개차반이 된 다음날 혼이 날까 두려워 살금살금 아내 선물을 사들고 들어오는 남편처럼, 다분히 헤라를 의식한 면이 엿보인다. 물론 그 정도의 선물로는 헤라의 분노를 조금도 가라앉힐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출산의 신이 내려가는 것을 막아 태어날 때부터 헤라클레스와 그 산모를 죽을 고생 시키는가 하면, 생후 8개월 때는 정말로 뱀을 보내 죽여버리려 했다. 헤라클레스가 장성한 후에도 온갖 고난을 끊임없이 내렸는데, 그를 일순간 미치도록 만들어 자기 손으로 직접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도록 만든것도 헤라였다. 따지고 보면 헤라클레스를 유명하게 만든 12가지 과업 역시 헤라의 저주 때문이었으니 헤라클레스를 향한 헤라의 복수는 그가 죽어 불멸의 신이 될 때까지 평생 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이 길고 긴 바람과 질투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제우스와 헤라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자. 문제의 시작은 당연히 제우스에게 있고 헤라의 지독한 복수는 그 반작용이었다. 요컨대 가정 불화의 원인은 100% 제우스의 귀책사유라는 말이다. 하지만 제우스의 입장에서 구태여 변명하자면 단순한 욕정을 넘어 세상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지혜의 신 아테나, 미의 여신 아프로티테, 태왕과 달은 관장하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상업의 신 헤르메스. 그리고 영웅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등등. 올림포스의 주요 신과 영웅들은 헤라가 아닌 여인들에게서 태어났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우스는 나름 불처럼 타오르는 아내의 질투와 복수가 짜증나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우스의 편집증적인 바람기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제우스와 헤라의 이야기가 나를 피식 웃게 만든 것은 이런 지점이다.
제우스는 최고의 신이다. 그리고 헤라는 최고의 여신이다. 최고의 신을 남편으로 맞아도, 최고의 여신을 아내로 맞아도, 그 남편과 그 아내는 서로에게 100%가 아니었다. 끊임없는 사고뭉치며, 골칫덩이며, 스트레스 였던 것이다. 신 중의 신, 최고 신 부부도 그렇게 다투고, 불만족스럽고, 삐그덕대면서 살아갔다. 하물며 신이 아닌 우리 인간은 어쩌랴. 세상이란, 우리네 관계란 원래 그런 게다.
"처음엔 정말로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일단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제 그런게 우리 삶이구나 받아들이게 됐다. 이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건져야 한다." - 세바스치앙 살가두, 보도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