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의 '모네, 빛을 그리다 展'에 갔다.
모네를 열거든 놓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우였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있는 <수련> 연작의 방에 들어갔을 때 정말로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 곡면으로 둥글게 이어진 3면의 벽이 무려 길이 87m에 이르는 장대한 <수련> 그림으로 둘러싸인 하얗고 커다란 방. 나는 고작 텔레비전 CF의 어딘가에서 보았던 그 작품을 만나기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 일찍이었다. 전시회 장의 문을 열기 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미 의외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입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고요한 모네의 수련들 가운데 나 혼자 둥둥 떠다녀볼까 했던 꿈은 역시 안되는 게로구나 싶었다.
입장이 시작되었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들어갔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오디오 도슨트를 귀에 꽂은 채로 첫번째 방의 그림들부터 차근차근 보는 것이 아닌가. 아하.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제일 커다란 다이아몬드 하나만을 노리고 부잣집에 들어간 대도(大盜)처럼 다른 그림들을 제쳐두고 그냥 전시실 안쪽으로 쭉쭉 들어갔다. 역시 안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소조차 미처 끝나지 않아 스태프들이 휴지통을 들고 다녔다. 다섯번째 방이었던가. 드디어 오랑주리 미술관을 재현한 수련의 방에 닿았다.
고맙습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나는 수련의 방 한 가운데에 앉았다. 그곳에 다른 누군가가 오기까지 다행히도 제법 많은 시간이 있었다. 수련 사이에 앉아, 80이 넘은 나이에 아내도 잃고 아들도 잃고 백내장으로 시력마저 잃어가면서, 문자 그대로 죽음과 싸우듯이 붓과 싸웠던 모네를 떠올렸다. <수련>은 일종의 기획 연작이었다. 그에게는 사명감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고통받을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어야된다는 생각이었다. 그 사명감 하나로 무너져 가는 몸을 끈질기게 버텼다.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겠다. 대신 반드시 시민들에게 일반 공개할 것." 이것이 모네가 요구한 조건이었다.
나는 물었다. 저 거대한 수련 그림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그의 사명감이 그림이라는 결과물로 빚어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맛본 평화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나누고자 하는 것이 모네의 바램이었다면 그저 사람들을 지베르니의 정원으로 오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한 발 더 나아가 수련과 연못과 정원과, 그리고 기차역(생-라자르, 1877, 모네)과 건초더미(1891, 모네)와 성당(루앙 대성당, 1894, 모네)을 뚱하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네의 그것들 앞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 속의 수련에는 소리도 촉감도 냄새도 없다. 아니 심지어 모네가 시력을 거의 잃은 후반기의 작업물에는 사실상 수련과 물결과 그림자가 구분하기 힘든 형태로 뒤섞여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장대한 불분명함 앞에 서서 걸음을 멈추고 감동을 느낀다.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은 모네의 의지 때문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그의 그림을 마주서서 수련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를 본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싸워가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고자 죽는 순간까지 붓을 들었던 그의 꿈을 보는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나뿐인 삶의 끝자락을 물감에 담가 온 몸으로 그려낸 그림. 그림을 통해 우리가 듣는 것은 저 그림 너머 모네의 목소리가 아닐지.
86세. 작품을 완성한 직후 모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오랑주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결국 보지 못했다. 다만 무한에 가까운 의지와 사명감으로 가난, 이별, 질병, 실명 따위의 개인적인 고통들을 짊어진 채, 죽음 직전에 필생의 역작을 남겼다.
그 덕분에 그의 수련 앞에 이렇게 내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