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히로키(黒田博樹)를 아십니까.
구로다 히로키는 일본의 프로야구 선수다. 보직은 투수. 그는 2014년 말 200억원의 연봉을 거절하고 불과 1/5 밖에 안되는 40억원을 제시하는 팀으로 이적하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그가 묵묵히 공을 던진 이력을 하나하나 짚어보면 가슴을 울리는 점이 적지 않다.
구로다 히로키. 그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11시즌 동안 뛰었던 히로시마 카프라는 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히로시마는 모기업이 없는 시민구단이다. 똑같은 프로팀이라도 뉴욕 양키스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처럼 자금이 넉넉한 구단이 있는가하면 십시일반으로 모은 종잣돈과 입장료 수입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가는 곳도 있다. 구로다 히로키가 자리잡은 히로시마는 전형적인 후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7년 연속 방어율 3점대 이하를 기록하는 등, 히로시마의 기둥 투수로서 꾸준하게 제 몫을 해냈다. 다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구단 소속인 탓에 전국적인 스타가 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 작은 고장 히로시마의 영웅이긴 했지만, 프로야구 전체를 놓고 보아서는 인기나 지명도 면에서 '좋은 투수'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랬던 그는 2006년에 무려 1점대 방어율을 찍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히로시마 카프 같은 가난한 팀은 연봉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FA선수를 잡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른 선수들이 그랬듯 구로다도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는 말로 FA 도전을 선언했다.
히로시마에서 그의 마지막 등판 경기였다. 다음 시즌,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다른 팀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카프 유니폼을 입은 구로다는 마지막 모습이 될 터였다. 그때였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히로시마의 팬들은 플랭카드를 이어붙인 대형 현수막을 들고 구로다에게 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Carp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그 외침이 구로다의 심장을 붙잡았다. 그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전격적으로 FA 포기, 히로시마 잔류를 선택한다.
"내가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카프 팬, 카프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나를 여기까지 키워준 것은 카프. 그 팀을 상대로 내가 힘껏 공을 던질 수 있을거란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 구로다 히로키, FA 잔류 선언 중
일본의 다른 어느 팀으로도 가지 않는 대신 구로다는 계약 기간 중 언제라도 미국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그리고 역시 빛나는 한 시즌을 보낸 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로 전격 이적했다. 33살. 사실 투수로서는 전성기를 지났다고 평가받을 나이였다. LA로 떠나며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꼭 힘이 남아있을 때 다시 돌아와 던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한다."
메이저리그에서 존재감을 과시한 한국과 일본 출신의 투수들은 여럿 있었다. 노모 히데오가 있었고, 그를 넘어서 아시아인 최다승을 거둔 박찬호가 있었다. 번쩍거리는 공을 던진 다쓰자카나 다르빗슈도 있으며, 현재 진행형인 류현진도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상대적으로 젊은 20대의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선수들이었다. 몇 년씩 부상으로 부침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구로다 히로키가 미국에서 보낸 7시즌은 특기할만 하다. 그는 30대 중반과 후반이라는 황혼기의 나이였음에도, 거의 부상을 당하지 않고 모든 시즌 내내 일관되고 꾸준하게 수준급의 성적을 냈다. 그 중에는 명문 구단 뉴욕 양키즈의 팀내 최다승(16승, 2012년)처럼 엄청난 기록도 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성적을 가능하게 했던 구로다의 마인드였다.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라면, 특히 나이 때문에 한 두해 앞을 내다보기 힘든 선수라면, 당연히 다년 계약을 원한다. 성적을 내건 못 내건 연봉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총액으로 말하는 '연봉 대박'은 대개 다년 계약에서 나온다. 그런데 구로다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를 붙잡아두기 위해 다년 계약을 제안하는 팀에게, 오히려 구로다는 1년짜리 계약만을 고집했다. 그의 나이 마흔을 바라볼 때의 일이다.
"더 이상 내년을 위해서 야구하는 나이는 아니다. 내가 왜 지금 야구를 하는지 생각하면서 늘 완전하게 불사르고 싶다. 다년계약을 하면 아무래도 2년째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 여력을 남기며 시즌을 치르고 싶지는 않다. 팀에 리스크를 떠안기지 않고, 매년 결과로 내 자신의 가치를 어필해야 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의 공포, 로테이션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두려움은 언제나 짊어지고 가야할 몫이다."
그는 매년 벼랑 끝에 자신을 세웠다. 두려움과 마주하면서, 나태함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돌아갈 배를 불태워버린 카이사르처럼. 그런 식으로 '환갑'이 지난 나이에 스타트 라인에 섰던 그는, 한 해 한 해, 후퇴할 줄 모르는 잠자리처럼 날아 상식과 예상을 벗어난 성과를 내놓았다.
2014년 말이었다. 뉴욕 양키스와의 1년 계약이 끝난 구로다에게 샌디에이고는 1년 18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200억을 제시했다. 그 제안을 받아든 구로다는 '생각해보겠다'고 즉답을 피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로다는 고향의 작은 구단, 히로시마 카프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연봉은 40억. 샌디에이고의 1/5에 불과한 액수였다. 무엇보다 2년 쯤 뒤에는 메이저리그 통산 100승을 기록할 수도 있는 페이스였기에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친정 복귀였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구로다 히로키는 말했다. '힘이 남아있을 때' 돌아가겠노라 약속했다고.
2015년 히로시마 카프에서 구로다 히로키는 26경기 11승 8패, 방어율 2.55의 변함없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2016년 시즌 히로시마 카프는 1975년 생인 그에게 전 일본 최고의 연봉을 계약함으로서 그의 신의에 보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