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이런 행동을 한다.
1.
일단 걷는다. 눈을 조금쯤 위로 쳐들어 건물 등 뒤에 숨은 구름이나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느릿느릿 걷는다. 걷는다고 해서 당장 답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구름을 보다 보면 '손으로 뜯어놓은 수제비네' 따위의 생각이나 하기 일쑤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다.
2.
차를 마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될 때도 있고 100개 들이 싸구려 둥글레차에 팔팔 끓는 물을 붓기도 한다. CF나 뮤직비디오 같은데서는 머그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올 때 글쓰는 이의 펜도 오탈자 하나 없이 기름처럼 미끄러지던데, 실제로는 거의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CF 모델이 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3.
운동을 한다. 달리기든 맨손체조든, 당장 심장에 트럭만큼 커다란 에어 컴프레셔를 연결해서 마구마구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온 몸의 혈관을 한바탕 뒤집어 놓으면, 밭을 갈던 농부가 우연히 옛날의 유물을 발견하듯 좋은 소식이 들려올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 운동을 하고 나면 글쓰기보다 맥주 한 잔이 '땡기는' 것은 '언제나 함정'이다.
4.
책꽂이를 만지작거린다. 언젠가 한 번 공부해 놓은 것들은, 비록 잊어버렸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 조금만 들춰보면, 금세 기억나기 마련이라고 장담한 것은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먼지 쌓인 책들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삐뚤빼뚤 그어놓은 밑줄이나, 끄적끄적 적어놓은 메모나, 당췌 왜 체크했었는지 알 수 없는 형광펜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도움이 되는 일이다. 잘만 하면 페이지 사이에 감춰놓고 까맣게 잊은 비상금과 조우할 수도 있고 말이다.
5.
방바닥에 누워 딩굴딩굴한다. 아이디어가 없어 괴로워하던 에리히 캐스트너가 바닥에 누워 식탁 테이블의 굵직한 다리들을 본 순간 문득 "에밀과 탐정들"의 플롯이 떠올랐다는 전설적인 일화에서 희망을 걸어보는 행위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인 백석처럼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중략)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그저 낮잠으로 귀결됨이 열이면 아홉이다.
6.
간식을 먹는다. 뇌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필요하다는 말과, 아까 먹은 밥이 사실 굉장히 부실했다는 불만과, 마침 어제 마트에서 사놓은 새로운 맛 프링글스 깡통이 뜯지도 않은 채로 있지, 라는 기억이 어우러져 가뜩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무거운 몸을 책상에서 벌떡 일으킨다. 그렇다고 과자 조각이나 우유 한 모금이 영감을 준 경험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다. 그 친구들은 영감을 못 주어서 미안한지 대신 자꾸만 체중계의 눈금과 피부 트러블을 주긴 했다.
6.
인터넷을 켜...려다가 참아야 된다, 고 생각하면서 마우스에서 손을 떼...려 하지만, 이미 '설현,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 CG가 따로 없네' 같은 기사를 클릭해놓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글감을 찾는데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행동이...지만 결국 여러분이나 나에게나 피할 수는 없으리라. 만일 여러분이, 나는 '설현, 실제로...'를 클릭한 일이 한 번도 없는데...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클릭은 아마도 이런 제목이었을 것이다. '어깨 깡패 김우빈 실제로 보면...'
7.
정말 글감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꽉 틀어막힌 하수관처럼, 무슨 일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산책을 하건, 차를 마시건, 책을 뒤적이건, 설현을 보건. 죄다 마찬가지다. 어느 방법 하나 '이것이 노하우다' 라고 이야기할 만한 것이 없다. 영업비밀처럼 감춰두고 싶은 기술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확실한 딱 한 가지 방법은 있다. 그것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꼬물꼬물 백지를 채워왔노라고 말하더라도 거짓은 아닐게다.
글감을 찾는 궁극의 기술이란, 단 한가지. 바로 희.망.을 갖는 것. 눈 속에서 토끼 발자국을 뒤쫓듯, 아무리 멀리 있어도 따라가다보면 마주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 그래서 비가 내릴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기에 언제나 성공률 100%인 '인디언 기우제'처럼, 포기하지 않고 짊어지는 것.
그리고 나는, 어쩌면 글감을 찾는 기술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노하우가 다르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설현을 '실제로' 보면, 의견이 달라질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