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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Feb 16. 2016

#158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사무실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니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본다.



드러내놓고 본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슬쩍 눈길을 아래쪽에 툭 던졌다가 다시 집어간다는 정도다. 몇 번 그러하길래, 뭐가 바지에 묻었나 하고 아래를 봤는데, 아마도 양말 때문이지 싶었다. 연보라색. 오늘 손에 잡히는 대로 신고 나온 양말이 발가락부터 발목까지 한결같이 일관된 연보라색이었다. 까만 정장 바지와 무채색 일변도의 셔츠, 실내용 슬리퍼마저도 까만 틈바구니에서 연보라색 양말이 제비꽃마냥 도드라져 보였다. 아아, 이것 때문이로군. 바지에 뭐 묻은 것이 아니라서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살던 동네가 그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편이든 간에, 다 같이 민둥산에서 방아깨비를 잡거나 돌조각을 모아 비석치기를 하면서 놀았으니 친구들 간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도,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아버지 친구 한 분이 옷을 만드는 공장을 하셨다. 어린이용 옷을 만들어 큰 회사에 납품을 한다는데, 아마 의류 브랜드의 하청업체쯤 되었나 보다. 두 번쯤인가 아버지가 그 공장에서 나와 내 아우가 입을 옷을 산더미처럼 얻어오셨다. 로고라던지, 회사 이름이라던지 그런 표식이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은 심심한 옷들이었다. 정말 많았다. 나이대 별로 해서 철철이, 그러니까 몇 년은 주야장천 밤낮으로 입을만큼 많은 옷이었으니까. 문제는 옷가게나 마트에서 가져온 옷이 아니라 생산 공장에서 직접 가져온 옷이다 보니, 옷이 딱 한 종류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옷은 새빨간 쫄바지였다. 허리 부분이 고무줄로 된 옷 말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그 새빨간 쫄바지를 입고 다녔다. 아니 수정하자. 새빨간 쫄바지'만' 입고 다녔다. 빨간 쫄바지를 입고 반장을 했고, 전교 어린이 회장을 했고, 졸업 앨범을 찍었다. 게다가 그때 나는 상당히 심각한 비만 아동이었다. 미쉘린 타이어 캐릭터처럼 뚱뚱한 몸에 몸에 딱붙는 쫄바지를 입고 돌아다녔으니 그 모습이 볼만 했을 것이다.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조회에서 늘 구령대 앞에 나가 '전체에 차렷, 교오장 선생님께에 대하여어 경롓'을 외쳤다. 빨간 쫄바지를 입고서. 


그 때의 단련 때문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둔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 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심한 편이다. 그저 나는 내 일을 하면 될 뿐 아닌가, 싶은 그런 심정인 셈이다. 구태어 <미움받을 용기>를 읽을 필요가 없는 부류랄까. 물론 스타일리스트가 스타가 되는 이 비쥬얼의 시대에 구석기인처럼 뒤쳐진 감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신 확실히 스트레스는 적다. 스타일을 내어주고, 무심함을 얻은 손익이 어찌될 지는 계산을 해보아야 알 일이지만 일단 나로서는 남는 장사같다.  


채제공(蔡濟恭)을 생각했다. 


영,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황희, 맹사성, 유성룡과 더불어 조선의 4대 정승으로 꼽힌다. 채제공은 어린 시절 몹시 가난했다. 절에서 수학하는 채제공에게 집에서 양식을 보내주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함께 공부하는 부잣집 자제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일이다. 여비는 물론 필기구조차 부족했던 그는 높은 벼슬을 하는 친구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부탁을 들은 친구의 아버지는 흔쾌히 붓과 먹을 내어주며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채제공이 정색하고 말했다. 


"저희 집이 가난하여 비록 도움을 부탁드리게 되었지만 제가 직접 물건을 들고 가야 합니까?"


그 당시 양반은 직접 손에 물건을 들고 다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미안하게 생각하며 하인을 통해 보내주겠다고 사과했다. 이에 채제공이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물러나려 하는데, 추위를 막기 위해 등 쪽에 넣어두었던 개 가죽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개 가죽은 천민들이나 쓰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제공은 낯빛조차 변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 개 가죽을 주워 다시 옷 안에 여미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길 '훗날 반드시 큰 인물이 될것이다' 라고 했다.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하다면 어떻습니까?"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은 가산이 넉넉했다. 공자가 어려운 시절, 그를 서포트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교랄까. 저 물음의 이면에 스승으로부터 조금쯤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괜찮다.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아는 것만은 못하다."


끄적이고 보니 마치 내가 가난을 즐기는 사람이라거나 채제공처럼 의연했다는 뉘앙스같다. 그런 의미로 시작한 글이 아닌데 손발이 어지럽다.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뿐인데 말이다. 


이따금 사람들이 우리를 보며 피식피식 웃거나, 수군수군 대는 일이 있더라도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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