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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Feb 18. 2016

#160 지식을 쌓는 공부, 지혜를 얻는 공부

법륜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세상에는 지식을 쌓는 공부가 있고 지혜를 얻는 공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무식하다'라고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무식하면 살면서 손해볼 일이 많이 생깁니다. 반면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다'라고 합니다. 지혜가 없으면, 어리석으면 삶이 괴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손해보지 않으려 바득바득 애쓰며 살지만, 삶은 괴로운 것이 됩니다."


그 말씀을 듣다가 문득 나는 어떤 공부를 하고 살아왔던가, 생각을 해보았다. 특히 공부할 시간이 무한정 있었던, 그러니까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학창 시절에 말이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도 부지런히 지식을 쌓는 공부로 시간표를 꽉 채웠더랬다. 결국은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루 종일 글자들을 머릿속에 긁어넣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 사막의 모래 언덕을 걷는 사람처럼 허덕였다. '애쓰며 살지만, 삶은 괴로운' 전형적인 학생이었다.  


적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미있었다면 산처럼 쌓인 모래더미도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여서 삼켰을테니까.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책들을 피해, 중앙도서관 서가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뒤적이며 살았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신분은 법대생이자 수험생이었기 때문이다. 체계가 있는 독서도 아니었다. '지식을 피해' 도서관으로 도망친 내가 필독서니 권장도서니 하는 것을 붙잡고 엉덩이와 싸울 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끌리는 책을 읽고 싶은 대로 읽었다. 딱히 내세울만큼 네임밸류 있는 책들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시절 찾아헤멘 행간 어딘가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법륜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식으로부터 도망쳐서 지혜를 찾아 돌아다닌 셈이 되겠지만, 그저 방황으로 보낸 20대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보니, 그 때 훨씬 더 잘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과 지혜가 칼로 자르듯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말이다. 지식이 쌓이면 지혜가 된다. 단순히 물리적인 지식의 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쌓으며 고민하고 노력하는 어딘가에서 지혜가 생긴다. '아하' 하는 깨달음이랄까. 


지식의 숲을 거닐더라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화두에 대한 답을 얻을 때가 있음을 이제서야 가끔씩 경험한다. 보통 종교서나 자기계발서에서 들고가기 좋게 포장해 놓은 알곡들이, 이제는 문학, 역사, 경제경영, 심지어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책을 읽을 때도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처럼 쏙쏙 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다. 


20대는 그랬다. 공부량의 문제였을 수도 있고, 경험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지금 이 페이지의 내용이 어떤 고민의 결과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물고 늘어지지 않고 빨리빨리 암기해서 삼키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다. 빨리 마스터하고 싶은, 쉽게 합격하고 싶은, 그러니까 결국 공짜를 바라는 도둑놈 심보 때문에 공부해야할 것들이 삽으로 퍼 날라야 할 모래더미처럼 메마르게만 보였다.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쌓는 것이 지식이라지만, '3년 안에 끝내겠다'거나 '남보다 빨리가겠다'는 식의 메마른 열정보다, 그저 다른 사람이 일백만큼 한다면, 나는 일천이라도 마다 않겠다는 자세로, 공부를 입안에서 사탕 굴리듯 이리저리 오래오래 품고 있었더라면 슬슬 달달한 지혜의 맛이 배어나왔을텐데.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자공(子貢)이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게 되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대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고 일은 힘들어 보였다. 이를 딱하게 여긴 자공이 두레박이라는 기계를 소개하며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정색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손해보지 않기 위해 쌓는 것이 지식이라지만 이렇게 해보면 어떨지. 


조금 손해봐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조금 품을 더 들여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대인과 같은 인백기천(人百己千)의 풍모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득 지식의 숲 사이에 숨어있는 지혜의 알곡들이 눈에 쏙쏙 들어올게다. 지혜롭게 지식을 쌓는 길이다. '애는 쓰겠지만, 적어도 삶은 덜 괴로울 수 있는' 공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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