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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17 전화 영어 울렁증

전화 영어의 설렘은 Hello 딱 거기까지

전화 영어를 시작한 지 3주가 되어간다. 


전화 영어 비즈니스가 히트를 친 것은 이미 몇 년 전의 일이다. 중앙 일간지에 전면 광고가 실리는 것도 심심찮게 보았고 회원수가 10만을 넘는 대박 업체도 있었다. 요즘은 저가의 인터넷 영어 강좌에 밀려 한풀 꺾인 느낌. '류현진도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홍보할 정도니 '시원시원'한 세력 확장이 자못 파죽지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내가 전화 영어를 시작한 것은 두 달 뒤 있을 출장 때문이다. 회사에서 하는 영어캠프의 인솔자로 미국에 가게 생겼다. '잘 됐다,  좋겠네'라고 이야기해주는 분들도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초등학교 학생 십여 명을 인솔해야 하고, 3주간 휴일 없이 seven - eleven 꼬박 일을 해야 하는데다, 현지 날씨는 40도를 훌쩍 넘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거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초등학생과 대화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말을 섞는 것도 어색한데 인솔이라니!). 잠이 많고 체력이 약해 '3주간 연속 근무'에 대한 걱정 역시 이만저만 이 아니다(지난 캠프를 인솔했던 분은 끝내 몸살을 앓았다). 설상가상으로(아니, 뙤약볕 아래 숯불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여름만 되면 더위 먹은 북극곰처럼 맥을 못 추는 스타일이다.


그러니 이번 출장을 맨발로 뛰어나가듯 반길 수 있나. 조금 과장하여 비유하자면 군입대하기 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일단 다녀오면 좋은 경험이 되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 길이 설레거나 즐겁기는 어려운. 뭐 그런 상태 말이다.



그중에서 꼽자면, 어려움 중의 어려움은 다름 아닌 영어다. 


나는 고등학교 이후로는 알파벳 책을 보지 않았다. 사실 고등학교 때도 수능 외국어 영역 문제집만 죽어라 풀어댄 정도니, 살아있는 현지 영어를 대할 때는 그야말로 먹통인 형편이다. 그런데 십여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미국을 다녀와야 한다니. 혹시 입국심사에서 어버버 대다가 수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심층 인터뷰실로 끌려가는 것은 아닐지 그것부터 걱정다. 학생들은 병아리처럼 인솔자를 따라올 텐데 무사히 공항을 통과할 수나 있을지.


그런 까닭에 부랴부랴 전화 영어를 신청했다. 회화 학원을 다닐 시간은 안되고, 생활 영어 핸드북을 보기는 지겹고, 색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지인이 추천한 것이 전화 영어. "생활 영어  회화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하루에 10분. 일주일에 사흘. 처음에는 너무 짧지 않나 했다. 고작 10분이라니 눈 깜짝할 새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달랐다. 10분을 10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주는 녀석. 바로 '부담감' 이었다.


나는 아침 8시 40분에서 50분까지를 택했다. 계산을 해보니 그때가 가장 확실하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시간대였다. 8시 30분이면 보통 회사에 나와있다. 이른 아침에 다른 급한 업무가 있는 경우도 드물다. 저녁에는 약속도 있고, 운동도 있으며, 불을 끄고 일찍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전화 영어를 추천한 지인은 회식을 마치고 귀가하는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받은 일도 있었다고. 만원 지하철 안에서 "헬로우. 아임 퐈인. 앤 듀? 마이 네임 이즈..." 아, 도저히 못할 노릇이다.



아침 8시 40분. 시작하기 전에는 즐거웠다. 자못 흥분도 되었다. 얼굴을 모르는 외국 친구와 펜팔을 시작하는 느낌으로 폰을 손에 쥐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 즐거움은 채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전화 영어의 설렘은 Hello. 딱 거기까지.


그쪽에서 뭐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말이 빨랐다. BBC의 앵커처럼 깔끔한 목소리도 당연히 아니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내가 건넨 한 마디.


Pa...pardon?


그리고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I am sorry. But I can not follow you. plz slow down."


그쪽에서는 아마 나더러 자기 소개를 하라는 것 같았다. 10분이 끊어지지 않는 엿가락처럼 길고 길었다. 나이와, 회사와,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과, 또 기억도 나지 않는 이런 저런 말들을 나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훑듯 끝없이 꼬물꼬물 이어갔다. 질문을 듣는 것이 무서웠다. 대화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프리토킹 클래스를 신청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쪽이 가능한 말을 하지 않도록, 나는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계속 중얼거렸다. 어색한 소개팅 자리에서 헛소리를 주워섬기는 당황한 남자처럼 말이다.


그렇게 3주가 지났다. 전화 영어는 여전히 괴롭고, 알아듣지 못하는 부담감은 변함이 없다. 8시 40분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오는 필리핀 코치는 두어 번 말을 섞었다고 Hi Hi 친한 척을 하는데, 내 기분은 좀처럼 Hi 하지 않다. 이제는 8시 35분이 되면 배까지 살살 아픈 느낌이 들 정도.  지난주에는 '아아, 몰라 몰라 나도 몰라' 하는 마음으로 홈페이지에 들어가 수업 연기 신청을 두 번이나 했다. 한 달에 연기는 최대 2회니, 이제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쓴 셈이다.


나는 과연 전화 영어 울렁증을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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