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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31. 2015

#18 아우는 말이 슬펐다

아무도 없는 빈 집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김치

지하철을 기다리는 출근길이었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허벅지가 물을 먹은 듯 묵직하고 눈꺼풀은 불타는 기름종이처럼 뜨거웠다. 지하철 구석에 어디 자리라도 있으면 빈대떡처럼 심신을 내동댕이쳐 눈이라도  붙여야겠다고 마음먹던 참이었다. "까똑" 아우가 보낸 문자가 막 폰 위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우는 저 추운 북쪽 나라 노르웨이에서 5개월째 지내고 있다. 거기와 여기의 시차는 여덟 시간. 노르웨이가 서울보다 늦다. 그러니까 내가 아침 일곱 시 출근 길을 나설 때, 아우는 슬슬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갈 채비를 하는 셈이다. 나는 노르웨이의 눈보라처럼 밀려오는 잠을 한편으로 제치며 카톡을 켰다.


아우는 다짜고짜 말했다. 


어제. 

꿈. 

대박. 



꿈속에서 훨훨 날았는지 어쨌는지 노르웨이를 떠나 신림동의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나도 없었고, 엄마도 없었고, 늘 신발장 옆에서 우리를 맞아주는 푸들도 없었다. 아우는 빈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부터 열었다. 냉장고는 최신 양문형 냉장고였다(현실과는 다르다). 안쪽에 가득한 것은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것도 현실과는 다르다), 그리고 김치.


아우는 강조했다.

"신선한 야채와 과일, 김치가 '그득그득'했어. 정말로."


"그런데 지금부터가 슬퍼."


야채와 과일을 꺼내 이것저것 먹는데,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비주얼은 분명 있는데 종이를 씹는 듯 무색무취. 꿈 속이니까 당연한 일인데, 아우는 그것이 굉장히 슬펐단다. 먹고 싶었던 것들을 먹는데 맛을 느낄 수 없는 기분. 그래서 아우는 김치통을 꺼냈다. 


이 김치 저 김치, 배추김치 물김치.  이것저것 집어먹어도 맛이 없었다.
맛이 없는 것이 서러워 허겁지겁 퍼먹었다. 


그러던 중에 잠이 깼다. 한밤 중이었다.

"눈을 뜨니 오슬로 기숙사여. 개 허전해."


아우는 말이 슬펐다. 지금쯤 노르웨이는 또 자정 무렵일 게다. 잠시 후 잠으로 들어가야 할터. 아무도 없는 빈 집과 맛이 나지 않는 김치 꿈을 또 다시 꾸지나 않을지.


아우는 오늘 하루도 수고하라며 손을 흔드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점심에 맛있는 거 사드시구랴."


나는, 회사 근처에는 먹을게 별로  없어,라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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