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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Apr 12. 2016

#173 왜 가야 하는지는 가 봐야 알 수 있는거니까

북경 여행 전야(前夜)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가야하는데 아직 짐도 챙기지 않았다.


트렁크는 옷장 위 깊숙한 곳에 마치 동굴 속 곰마냥 웅크린 채다. 이 끄적임을 마치면 그제야 메모지를 꺼내 준비물을 적기 시작할 게다. 아니 그 전에 츄리닝을 입고 근처 마트에 나가 고추장부터 사와야겠지. 중국 음식이 아무리 입에 맞지 않는다 해도 고추장 튜브 두 개면 그럭저럭 견딜만 할테니 말이다. 


나흘짜리 북경행이다. 패키지로 따라가는 길이니 특별히 신경써야 할 것은 그다지 없다. 비행기를 타 본 일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중국은 한 두 번 가봤다고 어디 동네 맛집으로 산책 정도 떠나는 것 마냥 마음이 차분하다. 콧바람이나 쐬고 싶다는 생각에 별다른 계기도 없으면서 일부러 찾아넣은 여행이다. 의의가 있다면 기껏해야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라는 정도. 그래도 추천평이 900개나 달린 튼튼한 셀카봉을 샀으니 메이꽌시(沒關係), 관계찮은 일이다. 


벌써 1년 반 가까이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는 아우는 공부하는 짬을 내어 여기저기를 꽤나 많이 다닌 듯 하다. 처음에는 흔한 영국이나 프랑스더니, 이제는 체코니 아이슬란드니 조금도 벽진 곳으로 찾아다닌다. 하기사 유럽에서 평생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슬로에서 영국행 비행기표가 KTX 경부선 값 밖에 안되니 딱딱한 빵 한 덩이만 씹어 먹더라도 신발 밑창이 닳도록 돌아다니는게 남는 장사다. 


아우와 이야기를 나누다 든 생각인데 여행과 미술관에는 공통점이 있다. 뭐냐 하면, 자꾸 가봐야 왜 가는지 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으면 왜 가야하는지 잘 모른다. 세상에는 말만으로 동기 부여할 수 없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아우가 그렇게 부지런히 이웃나라를(내 입장에서는 먼 나라지만) 돌아다니는 것은 은사님의 조언이 컸다. 젊은 시절에(그러니까 빵은 크림빵과 곰보빵 밖에 없던 시절에)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신 분인데, 지금도 여전히 시간을 쪼개가며(식사 시간이 아까워 비스킷으로 점심을 때우며) 논문을 쓰시고 연구를 하신다. 


그 은사님이 노르웨이로 떠나는 아우를 보고 두 가지를 당부하셨더랬다. 첫째, 공부 열심히 해라. 둘째, 여행 많이 다녀라. 깊은 산 속 암자에서 흰 호랑이처럼 소리없이 지내시는 노 학자가 맨몸뚱이를 밑천삼아 공부하러 떠나는 서른 살 제자에게 하신 말씀이 '돈이 없어도 여행은 많이 다녀라' 였던 게다. 


생각해보면 나는 바보였다. 20대 내내 제주도말고는 비행기를 탄 일이 없었다. 군 미필자였기 때문에 외국 여행 절차가 조금 번잡스럽긴 했지만, 일단은 어떻게든 기어나가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딱히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고, 딱히 그래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 한 장 보지 않고 퇴직할 나이가 된 직장인처럼, 여권 하나 만들지 않고 맹숭맹숭 서른이 넘은 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시간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겠지.


더 많이 보았으면, 더 많이 두드렸으면, 지금의 나보다 대단히 번쩍거리며 살 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생각해보면 나는 바보였다'라는 말은 덜 했을 것이다. 어쩌면 신림동 고시촌처럼 쪼그라든 마음을 탁 털어버리고 유라시아 대륙만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렇게 동굴 속 곰마냥 웅크리고 있는 먼지 쌓인 트렁크를 꺼내어 속옷과 양말과 고추장을 차곡차곡 담고 있다. 왜 가야 하는지는 우선 가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 사전 투표 마쳤습니다. No vote, No 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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