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평소에 오랜 시간 자신의 손을 응시하며 감탄하곤 했다
1.
에어컨 냉기와 창문 밖의 열기가 사력을 다해 다투던 오후였다. 뜨끈뜨끈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데 지친 나는 허기진 입을 달랠까싶어 부서 캐비닛을 열었다. 최근에 도착한 간식거리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다. 나는 소주잔만한 컵젤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예전에 우리가 '쩨리뽀'라고 부르던 녀석이었다.
2.
단물이 흐르지 않도록 포장지를 조심해서 벗겨냈다. 젤리는 컵의 머리끝까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한 귀퉁이를 베어 물었다. 야들거리는 딸기맛의 감촉이 앞니와 혀끝 사이에서 잠시 머물더니 이윽고 제 갈 길을 가듯 스르륵 사라졌다. 어린 시절, 겨우 하나를 들고 야금야금 몇 번이나 그렇게 쪼개 먹었던 기억이 입 안에서 살아났다. 그러자 문득 해보고 싶던 것이 떠올랐다. 나는 젤리를 통채로 털어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컵젤리는 저항하지 않았고 목구멍 너머로 스스륵 사라졌다.
3.
다 먹은 포장지를 버리려는데, 거기에 쓰여있는 성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 한 개의 열량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까만 글씨로 압인된 유통기한 아래에 영양성분이 적혀 있었다. 50kcal. 소주잔만한 컵 젤리 하나에 50kcal였다.
4.
요즘 내가 달리는 런닝머신이 생각났다. 별 일이 없으면 퇴근 길에 빠지지 않고 들러 런닝머신 위를 달리는 중이다. 시속 6km에서 14km까지 일관성있는 속도는 아니다. 햄스터처럼 제자리를 뛰는 일이 뭐 그리 즐겁겠냐만, 그래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 쳇바퀴 위도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유튜브를 흐르는 음악은 바그너부터 AOA까지. 역시 일관성이 없다. 전체적으로 보아 맘 내키는대로 뛰는 셈인데,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몇 달을 꾸준히 하니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졌다. 60분을 달려도 이제는 무릎이나 종아리가 투덜대지는 않는다. 회춘이라면 회춘이다. 다만 STOP을 누르고 머신에서 내려올 때는 매번 물에 빠진 햄스터 꼴. 팔목조차 땀이 흥건할 정도니까.
5.
그렇게 녹초가 될 때까지 달리면 도대체 얼마나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을까. 어떤 칼로리 테이블에 의하면 달리기는 고작 240~300kcal의 소모를 허락한단다. 그것도 무려 30분을 달린 뒤에 말이다. 30분이라면 내가 4.5km는 너끈히 달릴 시간이다. 그러니까 AOA 노래가 물리도록, 다리가 후덜거리도록 60분을 뛰어야 겨우 600kcal 정도를 태우는 셈이다.
6.
거기까지 계산을 마쳤을 때, 내 손에는 방금 우적우적 씹어서 스르륵 삼킨 컵젤리의 포장지가 들려있었다. 이 녀석이 50kcal. 야들야들한 딸기맛을 즐기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은 이 녀석 하나를 내 몸에서 지우려면 무려 5분을 달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빠른 템포가 흐르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에 발을 맞추어, 끝날듯 끝날듯 끝나지 않는 후주(後奏)를 원망하면서 달리고도, 인내심을 30초나 더 연장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달리기를 해 본 사람은 안다. 쇳덩이같은 다리를 질질 끌고 5분을 더 달려야 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나는 컵젤리의 포장지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7.
손가락에 묻은 끈끈한 단물을 휴지로 닦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몸이란 물건이 정말 대단한지도 모르겠다고. 고작 젤리 한 입으로 5분을 달려주는 몸이다. 흔하디 흔한 공기밥 한 그릇이면 30분을 전력으로 뛸 수 있다. 게다가 중국산 쌀인지는 묻지도 않고 말이다.
8.
다른 행동들을 보자. 수영은 달리기보다 조금 더 들고, 탁구나 테니스는 덜하다. 산책은 말할 것도 없다. 칸트는 공기밥 하나로 한 시간 반을 산책할 수 있었다. 컵젤리 하나로도 나는 30분 넘게 다림질이나 설거지, 혹은 아이쇼핑이 가능하다. 우리는 변변치 않은 것을 먹으면서도 <레미제라블>을 읽고, 25주년 기념 뮤지컬을 찾아 보고, 'One day more'를 반복해 들으며 내일의 희망을 그릴 수 있다.
9.
요컨대, 아무리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는 불만을 반대로 뒤집으면, 우리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라는 이야기가 된다.
정말 별 것 아닌 인풋만 있어도. 거의 맨주먹으로도.
10.
이쯤되면, 기적 아닐까.
11.
스티브 잡스는 평소에 오랜 시간 자신의 손을 응시하며 감탄하곤 했다. 이런 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무한한 일들을 생각하면 이 손은 정말 엄청나지 아니한가, 하면서. 그리고 그는 아이폰이나 트랙패드처럼 도구(마우스, 스타일러스)없이 터치로 작동하는 물건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둘, 셋, 네 손가락의 움직임을 동시에 감지하는 그런 물건들을.
12.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 기적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이 기적인 것처럼 사는 것이다."
13.
오늘은 평소보다 5분을 더 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