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처럼 프리젠테이션에 임한다는 것
회사에서 강의가 있었다.
주제는 '공부하는 방법'.
예정 시간은 60분 남짓.
지금껏 여러 차례 해왔던 공부 방법 강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공식적'인 자리라는 것. '지인'이 아닌 '담당자'의 요청을 통해, 사전 '공지'를 거쳐, 수강 '희망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기회라는 점이 그간의 강의와는 차이라면 차이였다.
하여, 잘하고 싶었다. 사내 규정에 따른 소정('소정'이란 원래 정해진 바, '所定'이라 써야하나 이번 경우에는 '少定'이란 중의적 표현도 가능했다. 오호 통재라.)의 강사료를 받기 때문은 아니었다. 자리에 모인 청중들이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유일한 이유는 이번 한 시간이 온전히 나의 의지에 달린 강의라는 것. 나에게는 마이크와 연단과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여기서 해내는 것이 지금으로서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므로 나는 마땅히 최선의 것을 보여야 했다. 이번에 나는 그 경계가 어디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제목은 이랬다.
서울대학생은 어떻게 공부하는가
다소 자극적으로 뽑았다. 며칠 고민 끝에 고른 제목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까지 출신 학교 자랑을 뽐내어 본 일이,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없다.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도 대략은 알거니와 고작 학창시절의 OMR카드 마킹 실력으로 그것과 무관한 여러 분야들에서 감당할 수도 없는 기대를 받고 싶은 생각 역시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제목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청중 분들이 서울, 경기, 강원처럼 먼 곳에서 이곳 구석진 불광까지 찾아오셨다. 기왕 먼 길을 오실 바에야, 가능한 풍성한 기대감을 안겨드리고 싶었다. 우리 뇌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대할 때 시냅스의 활성도가 높아진다. 더 많은 것을 캐치한다는 뜻이다. 목적의식을 드려야 오가시는 분들이 보다 의미있는 내용을 챙겨가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의의 질이 기대감을 충족시킬만하느냐의 문제는 내가 짊어질 책임이었다.
둘째, 공부의 방법에 관한 강의지만 나는 공부하는 요령이나 얄팍한 스킬로 컨텐츠를 채운 적이 없다. 단기간에 쉽고 빠르게 실력이 향상된다는 무수한 학습 광고들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 대학 동기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말이다. 따라서 '공부 방법'보다는 '공부 원칙'이라고 불러야 할 내용을 전달함에 있어, 저 밖에서 범람하는 가느다란 상술들은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강의 시작 전, 이 두 가지 이유를 언급할까 몇 번을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은 하지 않았다.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은 첫 장면에서 바로 핵심으로 파고든다. '자극적인 제목을 뽑았으나 저를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보지 말아주시라'는 완곡한 부탁은 핵심은 커녕 핵심의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기 변명 정도에 불과하다. 제목에 대한 비난은 비난대로 감수하는 수밖에.
한 시간의 강의를 위해 2만자의 원고를 준비했다. 일전에 PT를 할 때 1만자 원고를 읊는 동안 30분이 소요된 일이 있다. 내가 말이 빠른 탓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강사들이 이 정도 속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잔치의 여흥이 남아 있는데 음식이 먼저 떨어져버리는 일만은 없어야 했다. 파티의 호스트는 손이 큰 것이 미덕이다. 준비는 넘칠만큼 해 놓고 식탁이 좁다면 안 올려도 그만이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로 시작하여 "원칙은 언제나 요령을 이깁니다." 까지. 꼬박 60분이었다. 약속했던 대로 강의 시간을 정확히 마쳤다.
강의는 나쁘지 않았다. 준비했던 원고에서 빠뜨린 부분도, 깜빡 잊고 지나쳐 되감기를 눌러야할 일도 없었다. 적어도 외운 것에는 실수가 없었다. 집중도 면에서도 괜찮았다. 강의를 듣는 선생님들이 한 시간 내내 쉼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군데군데 부지런히 필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중간에 강의실이 덥다 여기셨는지 담당자 분이 천정에 달린 히터를 껐다. 뜨겁게 바람을 내뿜던 히터가 숨을 죽이자, 순간 실내는 초침 소리라도 들릴 듯이 조용해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고요함이 좋았다. 그래서 밀회를 위해 규수댁 담을 타넘은 무사처럼 목소리를 줄이고, 또 줄였다. 강의실에는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의 음성은 혼잣말처럼 가느다랬지만 사방의 하얀 벽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있다.
우선 몸의 움직임. 다시 한 번 느꼈지만 줄 마이크를 손에 들면 잠을 자다 어깨에 담이 결린 곰처럼 움직임이 둔해진다. 대형 특강에서 귀에 마이크를 꽂는 이유가 있다. 양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훨씬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텐데 안타까웠다.
그리고 유머감각. 내가 스탠딩 개그맨처럼 쉴새없이 빵빵 터뜨릴 능력은 안되지만 그래도 한 번 강의에 몇 번쯤은 청어 구이처럼 고급스러운 유머를 서빙하고 싶었다. 인문학과 테크놀로지를 강조하는 스티브 잡스도 중요한 순간에는 좌중의 배꼽을 한 웅큼씩 훔쳐내지 않는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왠지 이런 식의 결의는 유머감각에서 나를 점점 떼어놓는 것 같기는 하다만.
강의를 무사히 마친 후에, 전업 강사로 잘 살고 있는 친구 녀석에게 연락을 했다. 묻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원고 1만자에 30분, 원고 2만자에 한 시간 걸리던데, 내 말투가 빠른거냐? 원래 다들 이 정도야?"
이 녀석이 대답했다.
"나는 원고 안 쓰는데?"
머리가 띵 했다. 사진 자료가 많아서 구태여 원고를 안써도 된다고. 순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컨텐츠의 컬러가 다르니 저렇게 할 수도 있겠구나. 하긴 그렇다. 사진이든 글씨든 PPT에 힌트가 많이 들어가 있으면 일부러 외울 필요가 없다. 두 시간, 세 시간 강의도 쉬지 않고 할 수 있는 이유가 그거다. 그런 스타일의 강사는 뱃속 가득 풍부한 배경지식과 부스터가 달린 말주변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모두 시간과 경험의 문제.
나도 그런 스타일로 바꿀까? 멍하니 선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고를 쓰는 일도, 그것을 암기하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다. 아직은 한 시간 강의에 불과하지만, 머지않아 90분이나 120분, 그것을 넘어 180분으로 늘어나면 그 원고를 어떻게 감당할까 하는 걱정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2만자를 글자 포인트 10으로 출력하니 A4 용지 열 다섯 장. 두 시간 분량이면 서른 장이 될게다.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내가 닮고 싶은 프리젠터가 누구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프리젠테이션은 프리젠터마다 다르다. 누가 최고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를 최고로 닮고 싶다, 라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단연 스티브 잡스다.
며칠 전에 스티브잡스의 PT 일부를 다시 돌려보았다. 아이패드 출시 설명회였나 그랬을 것이다. 잡스는 프리젠테이션도 미니멀리즘이다. 배경화면에 한 개의 이미지 또는 겨우 몇 개의 단어만 노출된다. 주절주절한 문장이나 목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최대한의 단순함으로 최고의 집중력을 추구하는 것이 잡스의 스타일. 그런데 처음 깨달았다. 잡스가 한 두 문장을 말할 때마다 화면 위의 단어가 바뀌고 있었다. 즉 거의 모든 문장의 키워드는 잡스가 말을 하는 순간 동시에 화면에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의 의미는 분명했다.
잡스는 원고의 모든 문장을 깨끗이 외웠다는 것.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고 말이다.
그래, 나는 잡스 스타일을 원했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가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음식은 넘칠만큼 장만해두고 사정에 따라 내지 않으면 그뿐이다. 당분간은 이대로 가야겠다.
강의 후에 선생님 몇 분이 내가 몇 살일지를 놓고 가늠을 해보셨다고. 모두 틀렸다. 다들 나의 실제 나이보다 적게는 서너살, 많게는 대여섯을 젊게 보아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더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