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재우 Aug 01. 2015

#22 사람에게는 한계가 없다

김성근 감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

올해는 한화 야구를 좀 봐야겠어.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김성근 감독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나는 '색이 바랜 한화 팬'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바람에 칠이 벗겨져서 빨강인지 파랑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겨우 그 윤곽 정도만 희미하게 남은 담벼락 그림 같은 한화 팬 말이다. 내가 한창 야구를 보던 때, 그 때는 한화가 아니라 빙그레였다. 우리 아버지가 빙그레 회사를 다니셨기 때문에 모태신앙처럼 빙그레 유니폼을 받아들였다. 주말에는 야구 중계도 챙겨보고 주전 선수들의 이름도 외우고 어쩌다 스포츠 신문 쪼가리를 얻으면 '다승 10걸'이니 '홈런 10걸'이니 하는 개인 성적 순위표도 뒤적거렸다. 나름 진지한 야구 팬이었다. 그게 초등학교 시절이니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즐거웠던 시간은 길게 가지 못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책가방이 뚱뚱해지면서 야구는 <A급 수학>이나 <맨투맨 기본 영어>에 밀렸다. 더이상 동네 꼬마들과 야구 비슷한 놀이를 하며 '나는 선동열이다', '그럼 나는 장종훈이다' 같은 소리를 하지 않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던 것 같다. 더 이상 덧칠을 하지 않는 담벼락처럼 야구는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어느 사인가 빙그레도 한화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일부러 응원을 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다. 올해의 MVP나 홈런왕 자리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선수가 차지하는 것을 보며 나는 더이상 '야구를 본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였다. 외근을 나가는 스타렉스 안에서 사람들이 야구 이야기를 했다. 한화 팬과 LG 팬이 고추장에 비빈 보리밥처럼 섞여있었던 것 같다. 어제 경기는 어땠느니, 그 때 번트를 대지 말았어야 했느니, 투수교체가 잘못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새삼 신기하게 들렸다. 꽤 오랜 세월 관심을 끄고 살아온 말들이었다. "다들 야구를 보세요?" 하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회사에는 LG 팬과 두산 팬과 한화 팬이 삼색 나물처럼 섞여 있다고 했다. "혹시 야구 좋아하세요?" 지금은 퇴사한 디자이너 분이 물었다. 나는 "그럭저럭요. 볼 줄은 알아요." 하고 답했다.


나는 스포츠 중계 시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우두커니 앉아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응원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다. 국가대표 축구 경기도 90분을 버티려면 좀이 쑤시는 편이다. 약간의 애국심을 발휘해서 겨우 엉덩이를 다독인다. 물론 우리집에 소파가 없어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야구를 '본다' 함은 치킨과 맥주를 놓고 실시간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경기 결과와 관전평, 그리고 하이라이트 장면을 사후에 챙겨봄을 의미했다.


그나마 '그럭저럭, 볼 줄은 아는 정도'라도 야구를 챙긴 이유는 류현진 때문이었다. 퉁퉁한 류현진이 어린 나이에 온갖 타자들을 '씹어먹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감탄이 나왔다. 나는 원래 경탄을 잘한다. 압도적인 실력파에게는 아낌없이 '물개 박수'를 작렬한다. 그런 재미가 있어 류현진을 응원했다.



그가 메이저리그로 가고 나서 한화 경기를 챙겨볼 이유가 다시 사라졌다. 작년인가 한화가 개막전 이후 최다 연패 행진을 거듭할 때 잠깐 다시 관심을 가진 것이 전부였다. 단 한 번의 승리도 없이 무려 13연패를 쓰는 것을 보며, '그래 한 번 갈데까지 가보자'는 이상한 오기가 들었었다. 압도적인 실력파와 더불어 압도적인 꼴찌에게도 나는 마음이 간다. 그렇다고 한 번도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연전연승이 기적인 것 처럼 연전연패도 한 편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나는 압도적 꼴찌, 한화를 보며 자비와 인내를 경험했다. 그때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은 한화 팬들을 가르켜 '보살' 이라고 불렀다.


작년의 한화 야구는 수치상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단군 이래 최악에 가까웠다. 엉망진창인 성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적잖은 영감을 주었던(<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슈퍼스타 감사용>) 삼미 슈퍼스타즈에 맞먹는 성적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그러니까 쌍팔년도보다 6년이나 이전인 82년도에 1년 내내 꼴찌, 후기리그 성적 5승 35패 승률 0.125, 한 달간 승리를 챙기지 못하며 무려 18연패의 기록을 썼던 그 삼미 슈퍼스타즈 말이다. 2014년의 한화의 팀 방어율은 그 삼미보다 나빴다. 포털 사이트에는 한화 선수들의 어이없는 실책 동영상이 일주일이 멀다하고 올라왔다.


궁하면 통하는 까닭일까. 바닥을 친 사람은 튀어오르기 때문일까. 그런 한화에 올해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다. 김성근 감독이 누구인가. 그야말로 야구의 신. 지옥 훈련을 통해 쓰레기처럼 버려졌던 선수들도 갓 뽑아낸 알루미늄 캔처럼 번쩍번쩍하게 닦아놓는 분이 아닌가. 그것도 전부 꼴찌, 최약체, 신생구단들만 맡아서 일궈낸 성과들이다. 임창용, 최정, 정근우, 김광현. 김성근 감독 밑에서 배워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선수가 된 이름들이다.


돈이 많은 대형 프랜차이즈 구단 한화. 하지만 몇년째 꼴찌에 붙박이로 이름을 올려놓고 최악의 성적을 스스로 고쳐쓰고 있는 한화. 그리고 어떤 팀을 맡건, 최고로 만들고 마는 김성근 감독. 그래서 그의 이번 감독 부임은 개기일식처럼 완벽한 시나리오다. 김성근 감독을 한화에서 써달라고 한화 본사 앞에서 1인 시위까지 벌였다던 보살 팬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야신이었다.


부임 직후 라디오 인터뷰를 한 기사가 떴다.

나는 이 기사를 프린트해서 방 문짝에 붙여두었다.


"△한수진/사회자:야구의 신, 야신 김성근 감독이 다시금 프로야구 무대에 복귀를 했습니다. 한화 이글스의 새 사령탑에 오른 김성근 감독이 만년 꼴지의 독수리 군단을 과연 어떻게 변화시킬지, 또 프로야구 전체 판도를 어떻게 흔들어놓을 것인지 야구팬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백전노장 김성근 감독 연결해서 직접 말씀 나눠보죠. 감독님 안녕하세요?


(중략)


▲김성근:선수는 원래 김태균이나 정근우는 다 휴일인데, 어제부터 연습하기 시작했을걸요, 아마. 준비하기로.


△한수진:벌써 연습을 시작했다고요.


▲김성근:뭐 휴일을 하나도 안주려고 해요.


△한수진:휴일도 없이요. 감독님 지시사항인 거네요.


▲김성근:네.


△한수진:이제부터 이렇게 바로 연습 들어가야 된다, 휴일도 없다.


▲김성근:당연하죠, 꼴찌가 어디서 놀아요.


△한수진:아니 근데 벌서 취임식도 하기 전에 이렇게 강력한 지시를 내리셨군요.


▲김성근:취임하기 전에 계약을 했으면 끝난 거니까."



겨우내 연일 김성근 감독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을 채웠다. 어느 빅데이터 분석에 의하면 야구 감독에 관한 전체 기사 중에 '김성근'을 키워드로 한 것이 75%였다고 한다. 흙바닥에 나뒹굴어 흡사 수색대 군인처럼 보이는 대형 스타 선수들의 사진들이 넘실거렸다.


한화 선수들의 점심시간은 20분이고, 팀 전체가 평균 7kg 정도 살이 빠졌으며, 숙소에서 훈련장까지도 버스 이동이 아니라 달려서 간다고, 신문 기사들은 난리였다. 공식 아침 훈련이 무려 일곱시부터 시작인데, 조금만 늦추어달라고 불평으로 하자 여섯시 반으로 당겼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기사를 클릭하며 한화 팬들은 행복했다.


그렇게 훈련을 시켜도 선수들이 군소리 안하고 따라오는 것은 김성근 감독의 카리스마 때문이다. 책상을 '탕' 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그런 카리스마가 아니다. 500개니 1000개니 수비 훈련(펑고)에 필요한 공을 직접 쳐주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타자들이 스윙하는 동안 옆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자세를 교정하며,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훈련장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카리스마다. 


김성근 감독은 밤 10시 공식 훈련이 끝나면 헬스장으로 간다고 했다. 근육을 단련하지 않으면 일정을 버틸 수 없다고. 자정까지 혼자 운동을 한다 했다. 엔트리와 작전 구상, 데이터 분석은 그 다음에 시작하는 일과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 것일까. 


그의 나이는 올해 73세다.


한화가 달라졌다. 아직 시범경기지만, '세상에 이럴수도 있구나' 싶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김성근 감독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시범경기 중 지금까지 한화의 실책은 1개 뿐. 전체 팀 중에서 가장 적다. 불과 작년 말, 고교 야구 수준의 실책을 편의점 드나들 듯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던 팀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궁금해져서 그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샀다. <꼴찌에서 일등으로>, 그리고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단숨에 두 권을 읽어치우고 올해는 한화 야구를 보리라 생각했다.



"당시에 경기가 끝나면 나는 꼭 마무리 훈련을 했다. 대부분의 동료 선수들은 그런 것 없이 곧바로 선수단 버스에 올라탔다. 나 혼자만 하는 꼴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기다려주면서 혼도 내곤 했지만 어느 날 부터는 버스가 먼저 떠났다. 나는 훈련을 다 마친 다음 뛰어서 갔다. "새끼 하는 짓하곤. 누가 쪽발이 아니랄까봐." 그 때마다 난 구구절절이 변명하지 않았다. " - <꼴찌에서 일등으로> 중에서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는 게 만배는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감독이 되기 위해 야구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야 하지만 일반적인 교양과 상식이 풍부해야 한다. 지금 내 서재엔 야구 서적만 500권이 넘는다. 다른 서적은 더 많다. 나는 몇 문장만 좋아도 그 책을 산다. " - <꼴찌에서 일등으로> 중에서
"나의 야구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고, 재미없고, 어떻게든 이기는 야구, 일본식 야구라고 한다. 나는 이기는 야구를 하는게 아니다. 이기는 야구는 김영덕 감독이 한다. 김영덕 감독은 이기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 나는? 나는 지지 않는 야구를 한다. 이기는 야구와 지지 않는 야구가 뭐가 다르냐고? 상대의 실수로 이길 수도 있다. 우리 팀이 엉망으로 못해도, 상대가 더 엉망이면 이길 수 있다. 지지 않는 야구는 실수 같은 것으로 상대에게 승리를 헌납하지 않는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지지 않는 야구를 공략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기는 야구가 승수를 따진다면 지지 않는 야구는 패수를 따진다. 승수만 따지다 보면 자칫 패수 관리에 허술하게 되어 기껏 벌어놓은 것을 다 까먹을 수도 있다. 반면 패수 관리를 잘하면 승수는 자연스럽게 쌓인다. 지지 않는 야구는 과정을 중요시 한다.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과정이 헝클어져 프로야구 같은 장기 레이스에서는 치명적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기는 것에 집중하는 이기는 야구가 빠지는 함정이다. 과정을 중요시하면 꾸준한 전력을 유지하면서 장기 레이스를 마칠 수 있다. 지지 않는 야구를 하기 위해 나는 기본과 정석을 충실히 하고 우리 팀에 맞는 작전을 구사한다. " - <꼴찌에서 일등으로> 중에서




"긴장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실책도, 긴장도 실력이다. 실력이 부족해서 긴장하는 거다. 실력이 없으니까 미스를 범하는 거다. 실력이 갖추어졌다면 어떤 경기에서든 제 능력을 발휘한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중에서


"수비수가 다이빙캐치를 하면 멋있고 야구를 잘하는 줄 아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다이빙캐치하기 전에 수비 위치를 잡으면 아슬아슬한 수비를 할 이유가 없다. 공이 맞는 순간 그 공이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해서 그 위치에 먼저 가 있어야 한다. 그게 제대로 준비된 사람의 자세다. "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중에서


"리더가 이끄는 대로 자기를 발전시켜나가는 선수들을 보면 '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순한 마음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 중요한 점은 바로 그거다.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하고 쓸데없는 계산이 빠르면 아무리 훈련이 강해도 탈락한다. 성실하지 못한 자도 탈락한다. 남의 충고를 사심없이 순하게 받아들여야 산다. 그래야 성장한다. "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중에서


"한번은 펑고를 하다가 공이 목에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꾀부리지 않고 또 미친듯이 훈련을 다 소화했어요. 바로 그날 저녁 훈련 끝나자마자 변기를 잡고 울었어요. 침을 뱉는데 진짜로 목에서 피가 나오더라고요. 변기에 떨어진 피를 보는데 저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눈물이 쏟아졌지요.

'내가 왜 이래야 하나, 이렇게 해서 정말 될까?'

목이 아픈 것도 아픈 거였지만 그 와중에도 서러웠습니다. 안 되면 어쩌나 생각하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웠던 거지요. 왜 나는 재능이 없어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울다 보니까 속이 좀 가라앉더라고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될 수가 없다. 무조건 된다.'"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중에서


열흘 뒤면 김성근 감독이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맡았던 이야기를 다룬 <파울볼>이 개봉한다. 예고편만 보고도 눈물이 나왔다. 다큐멘터리인데 말이다. 4월부터는 이래저래 행복한 일이 많은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21 <7번 읽기 공부법>의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