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를 포맷할 줄 모른다면 엉덩이를 조심하시라
어쩔 수 없이 이따금 마주쳐야 하지만,
가능하면 정말로 피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다.
치과 진료와 예비군 동원 훈련, 그리고 갑작스런 컴퓨터 고장. 스케일링에 의료보험이 적용되면서 치과 걱정은 크게 줄었고 예비군 훈련도 올해가 마지막 해이니 산낙지를 통째로 삼키는 기분으로 눈 딱 감고 한 번만 버티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세번째 녀석. 그리고 그가 찾아온 것은 불행하게도 이번 주였다.
하기사 예전부터 이 녀석이 간간이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왔었다. 잘 움직이다가 갑자기 얼이 빠진듯 동작을 멈추는가 하면 아예 시퍼렇게 질려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문장을 방언처럼 궁시렁거렸다. 그럴 때마다 만병통치약인 리셋 버튼을 눌러 애써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무시했는데 최근에는 BLUE한 궁시렁거림이 훨씬 잦아져서 아무래도 조치를 취하긴 취해야 겠구나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짬나는대로 먼지 앉은 툴바나 전혀 액티브하지 않은 ACTIVE X들을 이따금씩 지우면서 이정도면 그래도 똥차 굴러가듯 갈거라고 여겼다.
젠장. 오산이었다.
중국 춘추시대의 명의 편작이 그런 말을 했단다.
"병이 피부에 있는 동안에는 고약으로 고칠 수 있고, 혈맥에 들어가면 침과 뜸으로 고칠 수 있으며, 장기에 침투하는 경우라도 약으로 고칠 수 있다. 하지만 병이 골수에 미치면 신이 오더라도 살려낼 수 없다."
1,2,3차에 걸쳐서 제나라 환후에게 병세를 경고했지만 환후가 이를 무시하자, 네 번째 진료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나온 후에 남긴 말이다. 닷새 뒤 환후는 갑자기 쓰러졌는데 이미 편작은 제나라를 떠난 뒤였다고.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 역시 환후처럼 어리석은 자라 편작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컴퓨터가 느려져 버벅거림은 피부에 든 병이요, 아예 '응답없음'으로 멍해지는 것은 혈맥에 든 병이며, 블루스크린이 되어 절규함은 장기에 든 병이라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야식을 끊지 못하는 고도비만 환자처럼 '네이버 클리너' 프로그램 따위의 반창고나 붙였으니 골수에 병이 미치는 수 밖에.
쉬지 않고 머리를 내미는 두더지 게임기 같았다. 실시간 감시 알약에서 지우고 지워도 바이러스 경고 메시지가 띠링띠링 올라왔다. 빠른 검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고, 계속 '치료하기'를 누르기도 귀찮아서 '정밀 검사나 실시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안그래도 'MAROON 5'의 <MAPS> 가사를 확인하고 싶던 참이라 검사 시작을 클릭해놓고 유튜브를 보면 되겠다 싶었다.
I was there for you(나는 네 곁에 있었어)
In your darkest times(네가 힘들어할 때)
I was there for you(나는 네 곁에 있었어)
In your darkest nights(네가 괴로워할 때)
But I wonder where were you(그런데 너는 어디있니)
When I was at my worst(나는 지금 바닥에 쓰려져)
Down on my knees.(무릎 꿇고 허우적대는데) - <MAPS> 中
캬아. 가사가 끝내줬다. 감탄을 연발했다. MAROON 5는 <THIS LOVE>도 좋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구만. 개천을 달릴 때 귀에 꽂을 노래로 <MAPS> 낙점. MAPS와 함께라면 그만 달리고 싶을 때 1km는 더 뛸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The map that leads to you(네게 닿는 지도)
Ain't nothing I can do(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The map that leads to you(네게 닿는 지도)
Following, following, following.(끝없이 따라가는거야) - <MAPS> 中
MAROON 5의 보컬이 내는 경박한 "Following, following, following"의 음성이 스피커에서 반딧불이처럼 희미하게 사라질 즈음 다시 알약 창을 띄웠다. 정밀 검사가 끝났으려나.
그런데 웬걸. 나는 눈을 비볐다. 헛것을 본게 아닌가 했다. 탐지된 바이러스 996개. 무시무시한 일이다. 십 수년 전 유행했던 악마의 숫자 666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바이러스가 가능할까. 항상 실시간 감시를 켜두는데. 실시간 감시로 잡히지 않는 바이러스가 이 정도 갯수라면 도대체 백신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아무튼 토끼처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치료 시작'을 클릭했다. "초기에 발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라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시뻘건 바이러스 목록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진행률을 알리는 파란색 막대기가 쭉쭉 길어졌다. 치료 속도는 996개라는 숫자에 비해 대단히 빨랐다. 분노한 주인이 '제어판 >프로그램 삭제> 알약 삭제'를 시킬까봐 겁이 났는지 이 녀석이 아주 열심히 달렸다.
디딩. 바이러스 제거 완료. 깨끗하게 끝나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컴퓨터를 다시 시작하고 싶어 시스템을 종료시켰다. 이제 좀 덜 버벅거리려나. 이번에는 MAROON 5의 <MOVES LIKE JAGGER>를 들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팅이 안 됐다.
윈도우가 뜨지 않았다. 로그온 프로세스 오류. 압류 딱지처럼 모니터 가운데 박힌 글씨였다. 전원 버튼을 눌러 강제 종료를 하고 몇 번이나 다시 켜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계속 로그온 프로세스 오류. 안전 모드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아이패드로 네이버 지식인에 들어가 내가 처한 상황을 여기저기 뒤적거렸더니 중병인 경우 알약 치료를 하다가 컴퓨터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포맷하고 윈도우를 다시 깔 것.
눈 앞이 캄캄했다. 첫째는 PC 안에 들어있는 이런 저런 자료들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한 번도 윈도우를 깔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컴퓨터는 늘 동생의 몫이였다. 그렇다고 동생이 기계 매니아나 공대생도 아니었는데, 어쨌든 우리 집에서 새장 청소와 푸들 양치질과 컴퓨터 포맷은 동생 담당이었다. 나는 조금 더 무지막지한 거실 걸레질과 12리터 생수 배달이었고.
천리 밖 바다 건너 타국에서 연어를 씹고 있을 동생에게 눈물 콧물 다 쏟는 이모티콘을 날렸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보이스톡으로 난감함을 토로했다. 동생의 대답은 이랬다. "윈도우 USB 빌려서 깔면 돼. 정 안되면 동네 컴닥터 불르면 3만원이면 될거야. 너무 걱정 안혀도 돼아." 아, 그런가. 그래. 안 되면 컴닥터 부르지 뭐. 나는 두껍고 살찐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그런데 보이스톡을 끊으려는 찰나에 동생이 한 마디를 껌처럼 덧붙였다.
근데 결혼해서 남자가 컴퓨터 못 고치면 구박 받는다던데.
눈앞이 캄캄했다. 정말? 그럼. 벌레 못잡는 남자와 컴퓨터 못 고치는 남자는 밥도 못 얻어 먹는다구. 연봉 1억쯤 되는거 아니면 할 줄 알아야지.
아아. 동생의 지적은 눈물나게 명쾌했다. 가만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우리집 컴퓨터가 고장나면 나도 압력솥처럼 화가 치밀었지. 책상 아래 있는 본체를 발로 쾅쾅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결혼한 다음에도 컴퓨터는 자연스럽게 가끔씩은 고장이 날 것 아닌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그 때 과연 아내의 발도 나와 함께 컴퓨터 본체를 향할까? 아니면 "남자가 되어 가지고 이거 하나 고칠 줄 몰라?" 하며 나를 향해 날아올까. 상상해보노니 식은땀이 흐를 일이다.
결국 직접 고쳐보기로 했다. 동생의 말로는 USB에 담은 윈도우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옛날에 윈도우 CD 사놨었는데 어디갔는지 없어졌다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하나씩은 있을테니까 빌려다 하라고 했다. 정말 별거 아니라고, 동생은 나를 안심시켰다.
처음이어서 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별거 아니지 않았다.
대략 열거하자면 이런 작업들이었다. USB를 꽂고 셋업 모드로 들어가 부팅의 우선 순위를 하드디스크가 아니라 USB로 바꾸어준 후에 재부팅을 하여 포맷 창을 켠다. 깨끗이 윈도우를 새로 깔고나면 늘 당연하게 여겼던 인터넷을 연결하고, 한글이니 온갖 프로그램을 다시 세팅해야 했다. 그리고 중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터졌는데, 모니터의 좌우에 검은 여백이 생겨 그래픽카드 드라이브를 새로 깔아야 한다던가, 인터넷이 액세스되지 않아 포맷 후에 인터넷 연결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다운받아와서 옮겨야 했다던가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단연코 말하건대 나는, 천리 밖 바다 건너 타국에서 연어를 씹고 있을 동생에게 눈물 콧물 다 쏟는 이모티콘을 날리기 전까지 위에 써놓은 저 문단을 이해조차 못하는 사람이었다. 네이버에 들어가 <낢이 사는 이야기> 웹툰이나 뒤적거릴 줄 알지 거의 컴맹이나 다름이 없었던거다.
하지만 결국 다 해냈다. 이전과 같은 작업 공간으로 만드는데 꼬박 이틀밤을 보냈다. 그것도 새벽 두시까지 낑낑 대느라 낮에 회사에서는 조기 춘곤증 환자로 꾸벅대면서 말이다. 물론 외장하드에 있는 약간을 제외하고 많은 자료를 고스란히 날리긴 했지만.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다.
윈도우를 처음으로 깔고 나니 요상한 자신감이 들었다.
그동안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들이 사는 캄캄한 동굴 속마냥 어려웠던 컴퓨터가 누런 황소처럼 순하게 보였다. 조금 과장하자면 앨런 튜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랄까.
밀린 업데이트 중이라고 재부팅을 반복하는 컴퓨터를 보며 문득 윈도우를 다시 까는 일이,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아무런 지도없이 일단 첫 발자국을 뗐다. 첫 문장을 쓰고, 윈도우 USB를 꽂았다. 그리고 네이버 지식인과 블로그에 의지해 그 다음 문제를 해결하듯, 첫 문장에 의지해 다음 문장을 써나갔다. 어떻게 하게 될지 알 수는 없으되, 모르는 부분은 찾고 해야할 일은 해 가면서 그저 한 걸음씩 내딛었다. 그러다 보니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고 동굴을 헤메다 보면 빛이 보이듯,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시간과 설치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를 만났다. 그리고 거기서 뿌듯함이란 선물을 받았다.
한 번 해냈으니 다시 하게 되더라도 두려움은 적다. The map that leads to you(네게 닿는 지도) Following, following, following.(끝없이 따라가는거야). 가다보면 닿게 됨을, 하다보면 알게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고작 사흘 전과 똑같은 상태로 복구되었을 뿐이지만 마치 홍수와 싸워 이겨낸 주민들처럼 나는 조금쯤 고양되었다. 그렇기에 선물없는 문제는 없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정말 컴퓨터를 고치지 못하는 남편들은 구박을 받을까?
나는 버터를 깍두기처럼 썰어 냉동실에 보관하지 않거나 털실 목도리를 짤 줄 모른다고 해서 아내를 구박할 생각이 조금도 없는데 말이다. 구박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부부라면 어떨까. 문제는 항상 있는데,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 구박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그러니 부부끼리는 서로 '구박 안하기 쿠폰' 같은 거라도 발급하면 좋을 것 같다.
"아이구 생일 선물 고마워요. 대신 '벌레 못잡아도 구박하지 않기' 쿠폰 하나 드릴께요."
"허허,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단골손님처럼 드나드니 쿠폰 한 장은 너무 적은 듯 하오. 한 달은 마음 놓을 수 있도록 다섯 장쯤 어떻겠소."
"다섯 번은 도저히 못참을 거 같으니 세 장으로 해요."
"그래요. 그럽시다. 고맙소이다. 여보."
"아유, 별말씀을 제가 고맙지요."
벌레가 좀 슬슬 기어다니고, 블루스크린도 좀 뜨고, 냉장고 속에 버터는 딱딱하게 굳은채 유통기한이 지나가도, 이런 가정이 훨씬 더 살만하지 않나. 남발해도 좋고, 인플레이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쿠폰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