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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May 24. 2019

#196 이제 나는 막막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


7.최선을 다해 삶을 사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최선을 다해 삶을 사는 방법은 복잡하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해야할 일을 정하고, 매 순간 집중하도록 노력하면서 하루 종일 그대로 살면 된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삶이 되므로, 삶을 꽉 채우는 길은 순간을 꽉 채우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열심히 살긴 했는데 되돌아보니 남은 게 별로 없다고 허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일도 하고 싶고 저 일도 하고 싶은데 다 할 수 없어서 괴롭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최선의 삶을 위한 고민이 아니다. 단지 욕심이다. 


사람들은 흔히 크고 훌륭한 무언가를 원하면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큰 것을 원하는 것이 욕심이 아니라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것이 욕심이다. 동시에 불가능한 여러 가지를 하고자 할 때, 나의 것이 아닌 것을 탐낼 때,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얻고자 할 때, 그 대상이 아무리 사소하고 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욕심이다. 욕심이 있으면 괴로움이 생기므로, 욕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최선의 삶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 닿을 수 있는 것을 소망하고, 그것에 닿기 위해 매 순간 집중하라. 오늘 하루를 꽉 채우는 사람은 삶 전체를 꽉 채우는 중이므로, 이번 생에서 이미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8.이제 나는 막막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


‘막막하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던 것은 작은 커피 가게를 운영할 때였다. 아침 등교 시간이나 점심 시간 직후를 제외하고는 손님이 많이 드물었다. 어제의 매상은 그저께의 매상과 비슷했고, 이번 주의 매상은 지난 주의 매상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월세를 내기 빠듯한 것은 이번 달이나 지난 달이나 매 한가지였다. 손이 빌 때면 탁자에 앉아 글을 끄적이거나 이미 깨끗한 창문턱을 괜스레 다시 닦았는데, 그러다 맞은 편 가게의 주인과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겸연쩍게 웃곤 했다. 정 안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든, 과외를 하든 길이야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지만 막막함에서 쉬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 시절 사진 속의, 지금보다는 확연히 어린 내 모습을 보며 시간을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제 30대 초반의 젊음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때의 막막함 역시 함께 사라졌다. 막막함으로 출발한 30대는 막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꿈틀거림이었다. 30대 내내 부지런히 나이를 먹으려 애썼고, 부지런히 애쓴 그만큼 해볼 만한 일들을 찾았다. 


이제 나는 막막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시간과 꿈틀거림의 함수다. 손님이 오기를 가만히 기다린다고, 한숨을 쉬거나 겸연쩍게 웃는다고 막막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의 힘을 믿으면서 부지런히 꿈틀거려야 한다. 사람을 만나고, 안 해본 일을 시도하고, 차곡차곡 ‘내 것’을 만들면 어느새 막막함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그때의 나에게 들려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이따금 한다. 막막함에서 느껴지는 괴로움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꾸 이야기가 하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9.잘 하는 사람은 이유를 알아도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모른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맥주를 마시고 잠들면 다음날 아침 몸은 반드시 맥주 값을 받으러 온다. 일이 손에 붙는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진작에 끝냈어야 할 문서를 고치고 또 고치며 끙끙거린다. 간밤에 들이킨 맥주의 양에 따라 그 시간은 점심 나절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밥을 먹고 와서야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네.’라며 새삼 기지개를 펴는 동료들을 직장에서 여럿 보았다. 

이런 끙끙거림은 노력이 아니다. 애초에 화낼 거리가 없음을 알면 화를 참아야할 필요가 없듯, 애써야 할 원인을 만들지 않으면 애를 쓸 필요가 없다. 일단 써 버린 후에, 텅 빈 지갑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방식과 거리가 멀다. 맥주 한 잔의 유혹을 견뎌냈으면 들일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고생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책으로 같은 시간을 공부했는데 결과가 같지 않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백에 아흔 아홉은 결과가 나쁜 쪽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결국 그들은 납득할 수 없는 차이를 타고난 머리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부분이다. 정작 공부를 잘 하는 사람 중에는 남들보다 덜 하고도 저절로 잘 했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집중했고, 이렇게 노력했으며, 이런 차이를 만들었다.’고 명확히 설명했다. 

잘 하는 사람은 이유를 알아도 못하는 사람은 이유를 모른다. 아마 고생과 노력의 차이를 모르는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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